“음식의 정체성은 곧 요리사 자신이다.” ㅍ(PIEUP) 다이닝 이상필 셰프를 만나다.

“제가 프랑스 요리에 된장을 조금 썼다고 해요. 그럼 그게 한식인가요? 프랑스 음식인가요? 사람들은 음식을 규정하려고 해요. 기존의 틀에 끼워 맞춰 이해하려고 하는 거죠.”

그 요리는 ‘ㅍ(PIEUP)’의 요리라는 설명 이외에는 불가능하다고 이상필 셰프는 말한다. ‘그럼 ㅍ이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요리’라며 이미 많은 요리사가 입을 모아 말했던 진부한 모범답안을 내어놓는다. 같은 질문을 계속 던져도 명쾌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속이 답답해진다. 요리사에게 왜 자신의 색깔을 고집하는 것이 중요한지, 요리사의 독창성이 음식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증은 번진다.

그의 요리인생 13년을 듣다 보니, 그가 찾고자 하는 ‘ㅍ(PIEUP)’의 요리가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 요리사로서 전혀 남들과 다르지 않았던 경력을 가진 그가, 자신만의 요리를 찾아내기 위해 대면했던 세상은 어땠는지, 그 과정이 얼마나 서툴고 대책 없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또 멀고 험난할지를 걱정하며 이상필 셰프를 소개한다.

 

| 문제아 날라리, 담배 연기 사이로 요리의 길을 보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배우고 일진 친구들과 어울리던 덩치 큰 불량학생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체격 좋은 학생을 발견한 태권도 선생님은 그를 도장으로 데려가 운동을 가르쳐주며 “내가 시키는 대로 운동하면 점심만 먹고 집에 갈 수 있게 해줄게. 대회 나가서 금메달까지 따오면 학교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안 나와도 돼.”라는 말로 꼬드겨 운동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배운 운동은 주먹질로 이어졌고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하고 만다. 실제로 그 짧은 시간 안에 금메달을 따긴 했으니, 금메달을 따면 학교를 안 나와도 된다는 태권도 선생님의 약속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험하게 다루다 부상으로 이어져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학교는 그만둘 생각으로 다른 진로를 찾던 참이었다. 어느 날 밤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태우는 데, 연기 사이로 요리학원 간판이 보였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격증 두 개만 있으면 대학은 간다더라.”

그 길로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요리학원에 등록했으나 난생처음으로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역량의 사람들을 만나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레시피도 안보고 저걸 다 만들지? 나랑 나이도 같은데?” 선천적인 체격의 우월함으로 다소 유리한 상황에서 타인과의 경쟁에서 매번 이겨 왔던 이 청년은 요리도 경쟁시합으로 여겼다. 속에서 화가 치밀었고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요리는 그런 전투적인 마음으로 해선 안 되는 것이라며 주변에서 만류했다. 당신은 요리에 재능이 없으니 일찍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진심 어린 충고도 들었다.

요리를 배우던 중, 가세가 기울어 학원비를 내기도 녹록지 않았다. 장롱 속 모셔두었던 금붙이를 내다 팔아 학원비를 충당했고 스무 두 살이 되도록 군대까지 미루며 한 길 요리만 팠다. 전국규모의 요리기능대회에서 수상하며 인정받을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만족감이 들었던 시절도 잠시,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이 새로운 요리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 책은 자연을 접시에 그대로 담아내는 요리사 미셸 브라의 것이었다.

5103FY8RFCL
재료와 접시를 자신보다 더 아낀다는 미셸 브라의 저서 ‘Essential Cuisine’

“그 전에 배웠던 요리는 하는 법은 똑같이 정해져 있었어요. 고기는 가운데에, 가니쉬는 뒤에, 소스를 앞쪽으로 보기 좋게 흘러내리도록… 한 순간에 이런 스탠다드들이 다 깨져 버렸어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가르치지도 않는, 아니 본인도 본 적이 없는 책을 들고 다니는 학생이 달갑지 않았다. 그 책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질문만 많아지고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으니 선생님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가르치는 것이나 똑바로 하라는 호통과 함께 그 책은 물이 흥건한 주방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원래대로의 코스를 밟았다면 호텔에서 충분한 월급을 받으면서 서른에 대리를 달고 마흔에 과장을 달았겠죠. 대학교로 가서 석, 박사 코스를 밟았다면 교수가 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겠죠.”

세계 무대로 진출할 꿈이 생긴 젊은 요리지망생에게 이제껏 해왔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작게만 보였다. 속으로는 자신의 큰 야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언젠가 앞지를 것이라는 독한 마음을 품고 주변에서 뭐라 하든 상관치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든 살이 되어서도 젊은 요리사들과 경합해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죽기 직전의 모습까지 다 그려놓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 “저는 10년 전의 호날두입니다. 당신은 퍼거슨입니다. 저를 영입하시겠습니까? ”

2006년, 허허벌판 사막 위에 도시를 짓겠다며 전 세계의 자본이 중동으로 투자되던 시점이었기에 호텔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도 급격히 늘었다. 중동의 한 호텔에서 한국인 요리사를 8명 채용한다는 공고가 떴고, 한국인 요리사 50명이 단체로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한국인 요리사 50명은 면접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상태로 대기하는 중이다. 하나같이 정장을 빼어 입었는데 마지막 번호를 받은 지원자는 급하게 온 것을 티라도 내려는 것인지 혼자 조리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서야 선배의 추천을 받아 잠시 외출 나온 것이라고 변명한다.

모든 지원자에게 간단한 질문과 대답이 오간 후에 이 마지막 번호를 받은 지원자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청년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기본 조건인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대답은커녕 질문도 이해하지 못해 기회가 물 건너가는 듯했다. 이 청년은 대답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 외치며 한 층을 떠들썩하게 돌아다닌 후 급조한 통역관을 통해 다짜고짜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저는 10년 전의 호날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퍼거슨입니다. 지금 저를 사면 싸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년 뒤에? 아무도 나를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할걸?”

그렇게 이상필 셰프가 처음 해외로 떠난 곳이 중동 카타르의 리츠칼튼 호텔이다. 배짱 좋게 뱉은 말과 강렬한 눈빛으로 면접관을 사로잡아 해외의 주방에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생각만큼 만만하진 않았다.

타지에서는 모든 것이 서툴고 힘들었다. 견습생이란 언제나 불려다니기에 바쁜 인력이어서, 담배를 필 짬이 잠시라도 생기면 밀렸던 담배와 앞으로 못 피게 될 것까지 감안해 3~4까치를 줄줄이 태웠다. 그의 승부욕은 화를 불렀다. 견습생 사이에서 지기 싫어하는 독한 녀석으로 인식이 굳었다. 겉으로는 씩씩한 척을 했지만, 숙소에 돌아오면 외로움에 못 이겨 혼자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다.

“매일같이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루하루 참으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새 휴일이 찾아오고, 그러다 한, 두 달씩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걸 깨닫는 거죠. 어차피 지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배우는 것이라도 제대로 배워가자는 마음에 노트를 사서 채워 넣기 시작했어요.”

중동 카타르 리츠칼튼 호텔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상필 셰프
중동 카타르 리츠칼튼 호텔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상필 셰프

그런데도 밀려 들어오는 주문을 빼내는 데에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말로 이해가 안되면 그림으로 그려서 이해했다. 모든 메뉴를 그려넣고 아이디어 스케치와 레시피를 뒤죽박죽 섞으며 노트를 채워나갔다. 요리사는 기본기가 충실해야 한다는 정석적인 배움을 받아들이고 수련의 시간으로 여겼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프랑스 주방으로 들어가 굳은 일을 뺏어 맡으며 프랑스 요리의 기본기도 수련했다.

 

| 멘토이자 인생 동반자로 세계적인 셰프 상훈 뒤샹브르를 지목하다.

그가 ‘ㅍ’PIEUP(피읖) 이라는 특이한 아이콘을 가지게 된 데에는 상훈 뒤샹브르(Sang hoon deguimbre)의 영향이 컸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셰프로 꼽는 상훈 뒤샹브르는 한국인이지만 벨기에에서 자랐고 레르 뒤 땅(L’air Du Temps)의 셰프이다. 둘의 첫 만남은 2011년이었다. 서울고메의 연사자로 초청받은 상훈 뒤샹브르가 한국에 왔다.

shd
상훈 뒤샹브르 셰프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나 5살에 벨기에로 입양되어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었다. 미슐랭 별 둘을 받은 식당(L ‘Air du Temps)을 운영한다.

이상필 셰프는 오래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고집이 분명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자신의 요리를 꿋꿋이 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요리에 자신의 고집을 부릴 수 있다니, 새로운 관점이었다. 동질감을 느꼈고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깟게 뭔데 세계적인 요리사와 동질감이 드네 마네야? 그 사람은 너를 알지도 못하잖아.”

동료의 비아냥거림을 한 귀로 흘려 듣고 주방에 사정해서 조퇴한 후 행사장을 찾았다. 운 좋게도 5분의 시간을 얻어 한 잔의 커피를 대접할 수 있었다. 요리사진과 포트폴리오가 들어있는 USB와 이력서를 건넸다. 짧은 시간 동안 친절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내고 싶었어요. 선망하던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영상으로 본 그 사람이 내가 그리던 사람이 맞는지, 5분 동안 받은 느낌이 사실과 다름없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근무하던 호텔주방으로 돌아와 대책없이 사표를 던졌다. 상훈 뒤샹브르 셰프는 아무런 답을 주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사표를 던져버렸다. 뒤늦게 답장이 돌아왔다.

“비자는 못 내준다. 여행자 보험을 들려면 네가 알아서 내라. 법적으로 따지면 무허가노동이니 돈도 줄 수 없다. 대신 레스토랑 위에 있는 작은 방은 내어 줄 수 있다. 정 오고 싶으면 와라.”

무턱대고 다시 올라탄 두 번째 외국행 비행기,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낯선 땅에 발을 디뎠고 공항에는 상훈 셰프가 마중 나와 있었다. 단 5분간의 만남이 전부였던 견습생을 배웅하기 위해 세계적인 셰프가 마중을 나오니 황송할 따름이었다. 따뜻한 포옹 뒤에 헤드셰프가 핸들을 잡은 자동차의 조수석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시내로 향했다. 한 시간쯤 지나 도착한 곳은 숙소가 아닌 주방이었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겠다고 하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뜸 앞치마와 칼 한 자루를 던져 주는 게 아닌가. 이내 레시피가 적힌 종이도 던져졌다. “30분” 별다른 설명도 없이 미션은 시작되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배웅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 쓸만한 녀석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데려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시험에서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3개월 동안 레르 뒤 땅에서 일할 수 있었죠. 그저 동질감을 느끼고 선망하던 셰프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자신의 색을 찾기 위해 떠난 여정은 쉽지 않았다. 요리학원 선생님이 자신이 가장 아끼던 책이 내던졌을 때부터 타지의 고향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 견습생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밤낮으로 경쟁할 때까지 쉽지 않았다.

“저는 쭉 왕따였어요. 카타르에서 일할 때에도 동양인인데다 영어도 잘 못했기 때문에 주방에서 일만 죽어라 했었는데 여기서도 팀원들과 친해질 겨를은 없었어요. 배우러 왔는데 주방에서 일하다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이 훌쩍 가잖아요?”

경쟁심에 긴장감이 맴돌던 팀원들과 함께 친해질 수 있었더 계기는 풋살 경기에서 첫 골을 넣었을 때였다. 처음으로 서로를 부둥켜 안고 환호했다. 인간적인 정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던 주방에서 느끼지 못했던 희열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타인의 체온, 그 때 머리 속에 들었던 생각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오늘 오후에 장사 진짜 즐겁게 할 수 있겠구나.”

벨기에 레르 뒤 땅 근무시절의 이상필 셰프와 그의 멘토 상훈 뒤샹브르
벨기에 레르 뒤 땅 근무시절의 이상필 셰프와 그의 멘토 상훈 뒤샹브르

벨기에의 3개월 체류 기간 무임금 스타지 생활의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그는 사진을 한 장 남겼다. 돈을 챙겨주지 못했으니 책이라도 한 권 준다며 상훈 뒤샹브르 셰프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책 2권 중 한 권을 이상필 셰프에게 선물했다. 셰프에게 직접 책을 선물 받은 사람은 아마 자신이 처음일 것이라며 뿌듯해 한다.

그리고 셰프에게 CDP(Chef De Party)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는 추천서를 받았다. 이후 자신의 요리를 찾기 위해 한국의 호텔과 레스토랑, 싱가포르의 조엘 로부숑(Joel Robuchon)과 잔(Jaan)을 거쳐 여정을 계속 이었다. 32살까지 배움을 목적으로 스타지 여행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자금 부족의 이유로 한국에 돌아온 때가 올해 1월이다.

DSC01799

| 나만의 요리 색을 찾다. ㅍ(PIEUP) 다이닝의 시작

이상필 셰프는 자신만의 요리를 설명할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 ‘ㅍ(PIEUP)’이라는 신조어를 붙인다.

“제 요리를 본 사람들은 꼭 이 이야기를 해요. 어디선가 너의 냄새가 난다. 그것이 뭔지를 잘 설명하진 못하더라도 저만의 특별한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거예요.”

팝업 레스토랑 ㅍ(PIEUP) 의 요리들
팝업 레스토랑 ㅍ(PIEUP) 의 요리들

이상필 셰프는 84년생 쥐띠, 올해 32살이다. 2015년 한 해도 스타지 투어를 할 계획이었으나 인연이 닿아 3~4월 두 달간 서대문구 부암동의 ILOT에서 자신의 이니셜 ‘ㅍ(PIEUP)’ 을 내건 팝업 레스토랑을 선보이고 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요리를 선보이는 이상필 셰프의 각오는 가볍지 않다.

“내가 제일 기본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각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있잖아요? 이탈리아 음식이 최고라거나, 부모님이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는 등. 저는 제가 한 요리가 제일 맛있거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요리를 선보인다는 것은 곧 ‘손님만족에 깃댄 자기만족’이라고 표현한다.

이상필 셰프가 요리를 만들 때 중요시하는 것 중 가장 우선 적인 세 가지는 ‘맛있을 것’, ‘손님을 배려할 것’, ‘놀라움을 선사할 것’이다. 다이닝 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한국에서 두, 세 번째의 조건이 9가지 요리가 나오는 코스요리를 먹는 경험의 가치를 설명해줄 수 있을 듯하다.

“많은 사람이 좋은 음식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식재료의 맛을 잘 살려야 한다는 것을 꼽아요. 식재료의 맛을 가장 잘 살리려면 식재료를 그냥 날것으로 먹으면 돼죠. 요리사는 재료의 본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식재료의 맛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죠.”

이상필 셰프는 2월 중순부터 보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팝업레스토랑을 준비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한계를 맞닥뜨렸다. 9가지 코스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엔 하나의 기성품도 쓰지 않았고, 도움받을 유통업자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불은 2개밖에 없었고 접시를 데울 워머가 없어 피자 굽던 화덕으로 접시를 데운다. 7명이 모인 팀원은 불과 2주 만에 4명의 핵심멤버만 남았다. 한계는 계속 맞닥뜨리는 것이며 자신은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피자 굽던 화덕을 접시 워머로 쓴다 (좌) / 9코스 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는 모두 100여 가지가 넘는다 (우)
피자 굽던 화덕을 접시 워머로 쓴다 (좌) / 9코스 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는 모두 100여 가지가 넘는다 (우)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흔치 않다고 생각해요. 그럴 용기가 있는 사람도요. 저는 치열하게 기본기를 닦았고, 또 저만의 색깔을 찾아 나가고 있어요. 앞으로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요리하고 싶어요”.

담배 연기 사이로 요리학원 간판을 보며 급히 시작한 요리였지만 어느새 그 각오와 목표는 세계 수준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세상도 5년 이내로 ‘ㅍ(PIEUP)’을 인정하고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호언장담에는 가식도 없었다.

_MG_5008

 

| 레스토랑 ㅍ(PIEUP)

–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pages/Restaurant-by-ㅍ-PIEUP/1629948817234014
– 전화: 010-3391-8139, 02-379-4003

맛은 주방장이 아닌 시스템이 만든다 – 한국 피에프 창(P.F. Chang’s) 최형진 총괄 셰프

중국집 맛이 변했다? 탓은 주방장이 뒤집어 쓴다. 손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묻는다. “여기 주방장 바꼈어요?” 재료 탓도 아니고, 조리방법의 문제도 아니다. 당연히 주방장이 변했으리라 으레 짐작하는 거다. 당연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유독 중식 레스토랑에서는 당연해진다. 그렇기에 주방장의 맛에 대한 권위는 독보적이다. 결국 중국집의 운명은 주방장의 혀와 국자에 좌우된다.

하지만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연 될까? 많은 중식 프랜차이즈들이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창업 컨설팅 전문업체와 설문조사 전문기업인 코리아리서치에서 공동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외식 프랜차이즈 중 중식 프랜차이즈 인지도가 10% 내외였다는 결과도 있었다. 한국에서 중식 프랜차이즈의 인지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이다. 프랜차이즈 대국인 미국에서나 제대로 된 프랜차이즈 중식을 논할 수 있을 정도다.
프랜차이즈의 핵심은 균일화된 맛과 시스템이다. 그러나 중식은 앞서 말한대로, 주방장의 요리실력에 따라 그 점포의 정체성이 정해진다. 그리고 이미 수십년간 중식은 프랜차이즈화에 어려움을 느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피에프 창(P.F. Chang’s)이 한국에 문을 열면서 그 흐름을 바꾸고 있다.피에프 창은 연매출 1조 5000억 원의 대형 중식 브랜드다. 미국에만 240개의 매장이 있으며, 전세계 40여개국에 분점이 퍼져있기도 하다. 그리고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문을 열었다.한국에 처음으로 오픈한 롯데월드몰점에서는 오픈 초반, 일 매출 2500만원이라는 놀라운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입장을 기다리는 손님이 30분을 넘게 기다리는 일도 비재했다. 중식 프랜차이즈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흥행인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이자, 사업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중요한 국가에요” 한국 운영 총괄을 맡은 최형진 셰프는 한국의 피에프 창이 왜 중요한지, 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말하기 시작했다.

| 젊은 중식 요리사의 도전

최형진 셰프는 이미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 중식 레스토랑인 홍보석의 주방장을 맡았다. 중식 요리사 모임인 ‘한마음회’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는 대만, 싱가폴, 중국 등 내로라는 중식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국내 최연소 중식 명사로 지정될 정도의 실력파 요리사이다.

이렇게 중식 주방장으로는 앞길이 창창했던 그가 3년간 고생을 자청했다. 피에프 창을 국내에 들여오기 위함이었다. 우리 중식 문화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미국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해야 했고, 기존에 알던 모든 요리 방식에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중식을 기반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요. 비결이 궁금했죠.” 이런 단순한 호기심이 결국 한국에 피에프 창을 들여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도 글로벌 중식 프랜차이즈가 성공할 수 있음을 미국 본사 및 한국 외식 시장에 증명하는 중이다.
2010년 후반, 그는 미국 애리조나 피에프 창 주방에서주방 청소부터 다시 시작했다. 주방장까지 했던 요리사라면 쉽게 할 수없는 일이다. 더 고되게 느껴짐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화된 업무 방식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업무 방식에 반감도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점점 시스템의 효율적인 면을 발견했으며, 맛을 잡는 세세한 부분까지 매뉴얼대로 지키고 있다는 점에 충격을 느꼈다.

우리 외식산업에 종사하는 인구 중 특히 중식 요리사들의 고단함은 소문으로도 익히 알 수 있을 정도다. 주방에서 면을 다루고, 칼을 사용하고 나서야 불 앞에서 웍(중국식 팬)을 잡을 수 있다. 업장에 따라서는 10여년이 걸릴 수도 있다. 최 셰프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젊은 요리사들이 실제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피에프 창의 한국 입점을 준비하는 중 그들의 인사시스템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 피에프 창, 글로벌화에 성공한 이유

현재 피에프 창은 세계 각국의 트레이너 급의 요리사들이 오픈 준비에 함께 참여한다. 실제로 한국 오픈을 준비하는 40일간 두바이, 필리핀, 멕시코, 캐나다 등에서 선발된 트레이너들이 국내 요리사들을 교육했다. 앞으로 한국 요리사가 해외 오픈 트레이너로 참여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피에프 창에는 젊은 요리사도 요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의 평균 나이가 24, 25 정도에요. 다른 한국 중식당이었으면 웍을 잡을 수 없을텐데, 교육을 받고 일하다 보니 이제는 선수들이 다 됐습니다.”


현재 롯데월드몰 점의 규모는 오픈 바를 포함해서 270석 정도다. 롯데월드 단일 층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그러나 주방은 의외로 외소했다. 요리에 필요한 최소인원으로도 80여가지의 단일 메뉴를 완성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숨어있다. 불 앞에 서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재료와 양념을 다룰 수 있다. 또한 모든 식재료는 매뉴얼대로 있어야 할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식재료를 다루는 요리사들도 모든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몇 온스의 재료가 사용되고, 몇 cm로 딤섬을 접어야 할지도 당연히 숙지한다. 운영 총괄을 맡은 최 셰프는 팀원들의 요리방법이나 관리에 집중한다. 메뉴가 나올 때 플레이팅에 관여하는 정도가 요리의 전부다. 주방장에 좌우되던 한국 중식과 다른 점이 이것이다.

| 한국 현지화에는 성공할 수 있는가?

앞서 아시아 최초로 문을 열었다는 설명은 본사가 한국, 특히 서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다. 창업자인 필립 치앙(Philip Chiang)은 서울을 매력적인 도시, 훌륭한 테스트 마켓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복병이 한국 피에프 창의 발목을 잡았다.
거대한 건물로 이슈를 만들었던 제2롯데월드 프로젝트는 안전문제라는 암초를 만나 난항을 겪고 있다. 투자되는 자본과 기술이 어마어마했고, 기대하는 이들의 시선도 비례했다. 하지만 흥행과 직결되는 안전문제가 거론되자, 기대는 풍선 효과처럼 줄어들었고, 의심과 불안은 상대적으로 더 많아졌다. 매출에 악영향을 끼친것은 당연하다. 처음 투입됐던 직원들 중 50%에 해당하는 40여명도 휴가 중이다.
아시아 교두보로 삼은 경영전략에 누수가 생긴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연달아 오픈한 코엑스 점이 선방하고 있다. 그렇다쳐도, 최 셰프는 고민이 깊다. 한번 가라앉은 소비심리가 언제 다시 회복세로 돌아설지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형진 셰프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보인다.

“피에프 창이 갖고 있는 맛과 서비스, 시스템은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셰프뉴스 좌담회] 대한민국의 디저트 문화는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페스트리 셰프를 준비하는 4명의 청춘에게 묻다.

지난 16일 발행된 박찬일 셰프의 칼럼 ‘해외유학 가야하나, 말아야하나(바로가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이왕 요리 유학을 가겠다면 디저트를 전공하라. 한국의 양식당 사회에서 빵과 과자는 저평가되어있다.  빵과 과자도 고급식당의 시스템에 맞게 실력을 갖춘 이는 아주 드물다. 즉, 테이블로 서빙하는 디저트는 봉지에 넣어 판매하는 빵 과자와는 다르다. 서양의 최고급 식당은 이 분야의 실력자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식당의 품격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의 디저트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세프뉴스는 페스트리 셰프로 활동하고 있거나 경력을 준비하고 있는 네 명의 젊은이를 불러 모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은호(이하 ) 반갑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참여해 주신 점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셰프뉴스의 이은호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눠볼 이야기는 페스트리 셰프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현재 하는 일에 대한 부분과 앞으로 전문적인 요리사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내용, 한국에서 페스트리 셰프로 남기 위한 이야기 등을 솔직하게 나눠보길 바랍니다. 우선, 자기소개 부탁하겠습니다.

박준완 (이하 ) 현재 페이스북에서 ‘도와줘요 달쉐프’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고요, 아프리카티비(Afreeca Tv)에서도 디저트 방송을 하는 중이에요. 나이는 27세이고요. 요리를 한 지는 6년이 되었고, 페스트리를 시작한 지는 3년 정도 된 거 같네요. 호주에서 일하다가 올해 7월에 들어왔어요. 원래 건축과 학생이었는데 웨이터로 일하다가 주방에 자리가 비어서 일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요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서승덕 (이하 ) 24살입니다. ‘화수목’이라는 업장에서 장진모 셰프와 일했었습니다. 현재는 내년에 오픈할 레스토랑 작업에 참여하고 있어요. 저도 건축을 전공했다가 1년 뒤 요리학과로 넘어왔습니다.

윤아영 (이하 ) 요리를 시작한 지는 1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물론 처음에는 요리할 생각이 없었는데, 요리학원에 다니고, 이태원 업장에 나가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술을 전공했는데, 입시를 준비하면서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던 미술을 접고, 조리학과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류영희 (이하 ) 요리를 시작한 지는 3년 정도 됐어요. 예전에 일하던 업장에서는 다이닝 코스도 길고 페스트리 파트도 따로 두는 곳이었는데 당시 자리가 비어서 일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디저트 분야를 맡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 지금 일하는 TocToc에서도 디저트를 주로 맡아서 일하게 됐습니다.

 

우선 용어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디저트 셰프, 파티셰, 페스트리 셰프 등 여러 가지로 쓰이는 데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할까요?

보통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파티셰로 이야기하자면 빵을 만드는 블랑제(boulage), 초콜릿을 다루면 쇼콜라티에(chocolatier), 아이스크림 등 차가운 음식은 글라시에(glacier) 등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파티셰들이 다 하는 일이죠. 저 같은 경우에는 빵은 잘 못 해요(웃음).

 

| 디저트를 다루게 된 계기

다들 어떤 계기로 지금의 일을 하게 됐나요?

건축을 전공했지만, 양식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업장에 웨이터로 일하다가 주방에 자리가 생기자 요리에 흥미를 느꼈고, 돈을 모아 호주로 가서 배울 생각을 했습니다. 호주에 르 꼬르동 블르(Le Cordon Bleu)가 있다는 걸 알고 갔습니다. 뭐 영어도 안되는 상황이니, 주방 청소부터 했죠. 근데 처음에 간 업장에서 페스트리 셰프를 한국분이 하고 있더라고요. 그분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연히 관심도 생기고 자리가 생겨서 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원래 단것도 좋아했고요. (웃음)

건축학과를 전공했었어요. 사실 지금 일을 하기 전에 마술도 했었고, 여러 가지 했었는데 재미를 못 느끼면서 학교만 다니다가 2년 동안 파스타 집에서 일했던 경험도 있네요. 2년 후에 학교에 복학했는데, 그때 학교에 강사로 오신 분이 지금 롯데호텔의 제과장으로 계신 분이셨어요. 그때 존경하던 셰프님들을 봤을 때 느껴지는 아우라를 처음으로 경험했죠. 아시잖아요? (웃음) 이후 2년 반 동안 마카롱을 만들면서 여러 가지 디저트를 공부했어요. 그러던 차에 우연히 ‘화수목’이라는 업장에서 페스트리 파트를 맡게 됐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요리를 한 건 아니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미술을 했었는데, 입시를 준비하면서 흥미를 잃었어요. 마침 집 근처에 요리학원이 딱 생기더라고요. 예전부터 만드는 걸 좋아하다가 한번 다녀볼까 해서, 다녔는데 조리학과로 진학하게 됐어요. 업장에서의 경험이 많은 건 아니에요. 이태원 레스토랑에서도 일해보고 했지만, 제과제빵에 더 흥미를 느껴서 지금 업장(Dessertree)에서 1년 가까이 일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고2 때까지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했어요. (웃음) 근데 열심히 했지만, 공부만 하기는 싫었어요. 대학을 남들과 똑같이 다니고 졸업하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아빠가 원래 식당과 레스토랑을 운영하셨고,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조리 과를 가기로 마음을 먹고 전문학교에서 서양조리 과를 전공했어요. 2년 다니다가 취업을 해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원래 디저트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컬리나리아(culinaria 12538)에 자리가 생겨 콜드파트에서 일하게 됐어요. 이후에 톡톡(TocToc)이라는 레스토랑이 오픈한 지 2주 정도 됐을 때 셰프님의 블로그를 통해서 열정을 봤고, 바로 자리 있는지 물어보고 면접을 통해 일하게 됐습니다.

 

| 페스트리 셰프만의 차별성

그렇군요. 다들 나름의 계기가 있었고, 현재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이 일하는 다이닝에서 만들어지는 디저트와 디저트 전문점에서 만들어지는 제품과의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음… 플레이팅 된 케이크도 원래 단품에서 시작된 거잖아요? 다이닝에서 나오는 케이크이나 카페에서 파는 케이크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다이닝에서는 ‘케이크를 플레이트 위에 해체한다’고 말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네요. 어울리는 소스와 같이 나가느냐의 차이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서 케이크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이 있는데 보통 디저트 플레이팅을 할 때는 그것을 다 분해해서 먹기 좋고 예쁘게 하는 방식으로 나가는 게 다르다고 생각해요.

 페스트리셰프의 포지션을 따로 두는 곳이 한국에서는 많이 없다고 들었어요. 코스로 제공되는 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디저트가 식사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야 해서 어느 정도의 디저트 물량이 정해져 있잖아요? 하지만 단품으로 판매하는 레스토랑에서는 판매되는 양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서 디저트 종류도 많이 늘리지 못해요. 그런 상황에서 빵하고 디저트만 만든다면 오픈 전에 물량을 맞추긴 쉽거든요, 다른 포지션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일의 양이 적은 거죠. 그러면 남는 시간에 주방에서 다른 파트의 일을 도와 주워야 하는 게 한국 레스토랑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포지션보다 멀티 플레이가 요구되는 것 같아요. 나중에 경력을 쌓아 다른 업장에서 일하게 될 때에도 페스트리 파트만 두는 곳은 없어서, 다른 파트의 일도 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되겠죠.

외국도 사실 비슷해요. 알라카르트(à la carte) 같은 경우도 주문이 들어오는 경우 바로 내줘야 해서 포지션이 있어야 하지만, 디저트 셰프들은 준비시간 이후에는 할 게 없어요. 그래서 가운데 비는 시간에는 주방으로 나가서 도와줘야 합니다. 실제로 다른 주방일도 할 줄 아느냐고 물어보는 보스들도 많고요.

멀티가 돼야 하는구나(웃음)

 

| 우리나라에서의 페스트리 셰프

이전에 박찬일 셰프님이 셰프뉴스에 기고하신 글이 있는데, 말미에 조언을 하셨어요. 그중에 ‘한식을 하라’, 그리고 ‘디저트를 하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연계해서 우리나라 실정에 대해 더 얘기해볼까요.

제가 일하는 디저트리는 디저트 레스토랑이고 할 수 있어요. 명함에도 ‘Gastronomic Dessert’라고 적혀 있어요. 손님들 중에는 디저트 카페인줄로 오해하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요. 일반적인 카페는 음료가 주가 되고 머핀이나 빵이 곁들어지는 형태잖아요? 근데 우리는 디저트를 전문적으로 하는 샵이라서 음료는 주된 메뉴가 아니에요. 그리고 예전과 달리 디저트가 각광을 받으면서 디저트 자체가 주목되고 있는 느낌이에요. 남자분들이 혼자서 찾아오는 경우도 늘고 있어요.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식사하고 나서도 따로 디저트를 위해 찾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정말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네,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확실히 3년 전이랑 다르게 변하고 있어요.

업장이 많이 변하지 않고 있는 점에 공감이 되는 것 같아요. 디저트리(Dessertree) 같은 경우는 디저트를 주로 하니까 잘 갖춰진 면이 많자나요? 파코젯라는 장비도 있고, 오븐도 많고. 근데 아직 오븐이나 장비가 갖춰지지 않은 업장이 많은 것 같아요. 페스트리만을 위한 주방이나 구조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거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머랭을 말리려고 오븐을 쓰던 중에 메인 요리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머랭을 빼고 오븐을 양보해야 했었어요.

근데 이제 조금씩 업장에서도 변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정식당도 이번에 리뉴얼하면서 그 구조를 갖췄다고 하더라고요. 박찬일 셰프님의 말처럼 디저트 셰프들이 전문화된 분야로 인정받고 더 확장되는 분위기는 느낍니다.

근데 우리 디저트 시장이 작을 뿐이지 일하는 사람들의 실력은 뛰어나거든요? 해외에서 대회를 열면 항상 상위권에 랭크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다들 외국으로 나가서 일하고 있어요.

맞아요. 우리나라에 잘하는 분들이 진짜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사실 그런 분들이 와서 일할 곳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서 외국 나가서 일하고 그러더라고요. 좋고 안 좋기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무래도 문화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직 우리는 한 상 문화이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같아요. 근데 우리는 한번 커지기 시작하면 빨리 크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마카롱 같은 경우도 그랬고, 에클레어(Eclair)도 최근에 유행이 잘되고 있잖아요.

 

| 페스트리 셰프의 허와 실

아무래도 외국 문화다 보니 국내에 정착되면서 변하는 게 있겠죠? 실제 파티셰 모습과 비치는 모습과의 차이가 좀 있나요?

친구 중에 한 명이 제가 템퍼링(Tempering : 온도조절을 통해 카카오 버터 안에 들어 있는 지방산들을 서로 붙여 결정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어묵 만드는 일하고 뭐가 다르냐”고. 정곡을 찌른거죠.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하게 보일 뿐이에요.

맞아요. 힘들어요. 여자 같은 경우에는 환상이 많은 것 같아요. 뭔가 아기자기하고 예뻐 보이고 쉽게 보이거든요. 특히 제가 일하는 곳은 오픈되어서 처음 보면 쉽게 보여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손님들이 보는 1층에서는 예쁘게 플레이팅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진짜 작업은 지하 작업장에서 하거든요.

그거는 보여주기 위한 쇼-베이킹(show- baking)이죠. 뒤에서는 밀가루 포대 나르면서 땀흘리는데(웃음)

낑낑대면서 설탕 옮기고, (웃음) 근데 디저트를 시작하면서 느꼈지만 정말 위험한 작업들이 꽤 있거든요? 특히 카라멜라이징을 되게 많이 하거든요. 온도가 180℃ 정도 되는 설탕은 뜨거운 물에 데는 것과 달라요. 물에 적시면 안 되고 바로 병원에 가야 돼요. 잘못하면 피부에 완전히 달라붙거든요.

진짜 위험하죠. 예전에 같이 일하던 헤드셰프가 실수로 녹여놓은 설탕을 물인 줄 알고 옮기다가 손에 쏟았어요. 그래서 손 전부에 화상을 입은 것도 봤어요.

일반인이 갖는 환상 때문에 주방을 소재로한 드라마를 잘 안 보는 편이에요. 말한 것처럼 위험한 작업이라든지, 힘든 일을 처리하는 건 안 나오잖아요. 게다가 여자 한 명에 다 남잔데, 다 키도 크고 잘생긴 줄 안다는 거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웃음)

 

| 어떻게 해야 좋은 페스트리 셰프가 될 수 있는가?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좋은 페스트리 셰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막 시작하는 여러분이 현장에서 느꼈던 바를 기초로 이야기 해 볼까요?

저는 좋은 셰프가 되는 것과 일을 잘하는 셰프가 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유명한 디저트 셰프들도 나눠보면 만능으로 모든 디저트를 다 잘 다루는 분이 있는 반면에 레스트랑 안에서 메뉴 구성 같은 자신만의 철학을 잘 담아내는 셰프도 있잖아요. 어떤 셰프가 되고 싶은지 먼저 기준을 잘 선택해야 할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다른 셰프님과 얘기를 하는게, 디저트만 하던 데서 일하던 분이 레스토랑에서 일해도 잘할 거라 봐요. 비록 완성도가 높진 않지만, 일반적으로 디저트 전반을 다룰 줄 알고 난 이후에 다름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장기적으로 생각해보면 레스토랑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몸값을 올린다는 개념으로. 홀에서도 일해보는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앞에서 말씀하신 다른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앞으로 더욱 전문적이고 차별적인 페스트리 셰프가 되려면 다른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죠. 더욱이 요즘에는 식재료에 대한 경계가 뚜렷하게 갈리는 것 같진 않아요. 그래서 디저트를 한다고 한정된 식재료만 사용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다른 요리를 알아야 한다는 의견에는 공감하지만 디저트 셰프가 되고 싶다면 일단은 혼자서 해보고 연구해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일단 디저트를 다루는 식재료 종류가 많잖아요? 설탕이나 소금이 그렇고, 소스도 그렇고요. 알면 알수록 할 게 많은데, 그런 부분들은 그냥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배워가야 할 부분이겠죠.

네. 이 정도로 모든 대화는 마무리하겠습니다.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만간에 멋진 활약으로 다시 만나길 기대할게요.

 

[divider]

진행 이은호

패널

박준완 – 아프리카tv와 페이스북 채널(도와줘요 달셰프) 운영
윤아영 – Dessertree 소속
류영희 – TocToc 소속
서승덕 – 전)화수목 소속, 레스토랑 오픈 준비

정리/사진 이인규

 

셰프 왓슨(Chef Watson) 프로젝트 베타테스트 시작 : 지구 최강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주방에 들어서다

small battle<사진 – 제퍼디 쇼에 출연한 왓슨>

2011년 2월 14일, 슈퍼 컴퓨터 왓슨(Watson)이 미국의 유명 퀴즈쇼 제퍼디(Jeopardy)에 출현했다. 제퍼디쇼의 이전 우승 챔피언이었던 켄 제닝스(74연승으로 역대 최고 금액의 250만 달러를 상금으로 땄다.)와 또 다른 챔피언 브래드 루터가 초대되었다. 이 특별 경기는 3일간 치워졌다. 첫날의 경기가 끝났을 때 상금은 각각 왓슨 35,634 vs 제닝스 4,800 vs 루터 10,400이었으며, 둘째날에는 77,147 vs 24,000 vs 21,600. 점차 격차를 벌여나가서 최종일에는 결국 왓슨이 우승하여 100만 달러를 받았고 제닝스와 루터는 각각 30만 달러와 20만 달러를 받았다. 인간 도전자 두 명은 절반의 상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왓슨은 상금 전액을 기부했다.

제퍼디 퀴즈쇼에서 우승한지 3년이 지난 지금, 왓슨의 속도는 24배 빨라졌고, 크기는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업그레이드 된 지구 최강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다음으로 찾은 곳은 바로 주방이다.

small thumb

왓슨은 자연어 형식으로 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인공지능 컴퓨터 시스템이다.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 다른 슈퍼컴퓨터와 다른 점이다. 자연어인식은 음성인식과는 다른 뜻으로 인간의 언어 구조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셰프 왓슨’(Chef Watson)으로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미국의 요리 잡지 Bon Appetit과 협업하여 진행되고 있다. Bon Appetit은 1956년부터 발간된 미국의 음식&요리 월간지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와 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셰프 왓슨이 작동하는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우선 사용할 재료를 입력하고(또는 사용하지 않을 재료를 제외하는 것도 가능) 다음으로 음식의 종류를 선택한다. 마지막으로 요리의 스타일이나 식사의 분위기를 고르면 최소 100개 이상의 레시피가 추천된다. 이 레시피는 기존에 Bon Appetit이 보유하고 있던 9,000개의 레시피를 기준으로 보완된 것으로, 이 결과값을 활용해 요리사는 마음껏 자신의 요리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

rs_560x415-140307154429-1024.ibm-watson.cm.3714<셰프 왓슨으로 개발된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는 푸드트럭, IBM에서 직접 운영한다.>

IF<2014년 3월 SXSW에서 실제로 판매해 새로운 맛으로 호평받은 Roast Duck 메뉴>

“거기서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시니어 소프트웨어 기술자인 (요리학교도 졸업한) Florian Pinel은 “여러 식재료를 조합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1000조가 넘는다.” 라며 “컴퓨터가 내어놓은 결과값을 토대로 요리사가 음식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셰프 왓슨은 요리사를 대체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요리사를 돕기 위한 프로젝트다. 요리사가 새롭고 독특한 레시피를 찾아내거나 만들어 낼 때, 컴퓨터가 수많은 재료들의 향과 맛, 영양의 조합을 계산해 도와주는 솔루션인 것이다. 컴퓨터는 레시피를 조합해 내어 놓을 뿐 결국 요리는 사람이 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두, 세 가지 정도의 재료를 섞었을 때의 맛과 향을 예상해 볼 수 있다. (The Flavor Bible이라는 책에서 식재료들의 조합에 대해 탐구하고 기록해놓았다.)  셰프 왓슨은 예닐곱 개의 재료 조합의 결과도 어려움 없이 예상할 수 있다. 예상이라는 표현 보다는 계산이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맛과 향의 조합에 대해 접근하는 컴퓨터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The Flavor Connection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http://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flavor-connection-taste-map-interactive/)

flavor map

여기서 보여진 Flavor Map은 컴퓨터가 가지고 있는 극히 일부분의 정보다. ‘구운 쇠고기(Roasted Beef)와 잘 어울리는 재료들의 조합’만을 시각화 한 것이다. 한 가지의 식재료를 시작으로 이렇게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니, 지구상의 모든 식재료를 조합한 경우의 수는 얼마나 방대한 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image new interface<셰프 왓슨 접속 페이지의 모습 – 우측에 결과값이 보이며 설정을 변경하는 순간 실시간으로 결과값도 수정된다.>

image new interface-1<이전 페이지의 우측 결과값을 누르면 위와 같은 레시피를 확인할 수 있으며, Classic과 Surprise Me 슬라이드를 조정함으로 기존의 레시피에 충실할 것인지 또는 새로운 레시피에 도전해 볼 것인지 고를 수 있으며, 그 결과값 또한 실시간으로 바뀐다.>

‘셰프 왓슨’은 기존에 베타테스터 신청을 한 사람에 한해 지난 24일(월요일)부터 베타 서비스를 체험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 일주일 사이에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내어놓는 등 빠른 수정을 거치며 더 많은 사용자들이 편히 사용할 수 있도록 UI를개선하고 있다.

셰프왓슨이 요리역사에 새로운 혁신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의 패널토론 : 전 세계적인 요리사 3명은 한국에 무슨 이야기를 남겼나?

a2

2014년 11월 19일 롯데호텔에는 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가 글로벌 리더스 포럼에 참여해 한자리에 모였다. “세계 3대 셰프에게 음식의 길을 묻다” 세션은 각 셰프들의 발표와 7명의 패널이 참여한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토론은 한 시간가량 진행되었으며 질문 중에는 패널이 직접 던진 질문도 있고 관객의 질문을 패널이 대신 전달한 것도 있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 한국어가 뒤섞여 진행되었던 만큼 모든 내용을 직역하기란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통역된 내용을 토대로 본래의 단어나 구절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살려 의역하였음을 밝힌다.

* 아래 내용을 보기 전에 셰프들의 발표내용(http://chefnews.kr/archives/1408)부터 읽기를 권한다.

 

  • 피에르 가니에르에게>>> 해외의 수많은 도시에서 레스토랑을 오픈하기 위해 다른 팀과의 협업이 필요했을 것으로 압니다. 그 과정에서 독창성과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하우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올해로 제가 64세입니다. 나이가 많은 편이지요. 제가 30년 동안은 한 곳에서만 식당을 운영했습니다. 런던에 처음으로 해외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 제 나이 54세였습니다. 제가 40세였을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누구이고 어떤 요리를 하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게 정립되는 데에는 많은 고민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레스토랑 운영의 키 포인트는 협업입니다. 어디서 일하든지 팀원들과의 협업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피에르 가니에르만의 요리를 내어놓는 데 어떤 노하우가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내 요리를 전달하려 하거나 내 이야기만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함께 일하게 될 팀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한국에서는 롯데그룹과 일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오만하지 않은 자세로 많은 대화와 이해를 통해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4444

 

 

 

  • 르네 레드제피에게>>> 덴마크는 혹독하리라 할 만큼 추운 겨울을 가지고 있고, 노마의 첫 시작 시점에는 그 방향이 메인스트림과 달랐습니다. 그런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 목표를 확실히 설정할 수 있도록 영향을 준 덴마크의 문화는 무엇이었나요?

덴마크에는 북유럽의 개신교가 들어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즐기는 것이라면 죄악으로 여기는 사회입니다. 음식이라도 정도를 넘어서 즐기게 되면 지옥에 간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런 인식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개혁을 위해서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들입니다. 음식을 즐긴다던 지 음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인생을 즐기는 모습을 비치기만 해도 ‘부르주아 놈’이나 ‘무지몽매한 놈’이라는 욕을 얻어먹습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이 선(善)한 것이라 표현하면 받아들여지는 편입니다.

 

  • 르네 레드제피에게>>> 당신의 음식을 ‘그린 푸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동의하나요?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채소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그나저나 그린 푸드가 뭘까요?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라 이해하고 답변하겠습니다.

저는 마케도니아의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척박한 곳이고 멀리서 수급한 음식들은 비쌌기 때문에 렌틸콩요리, 지역 채소를 활용한 스튜 요리를 주로 먹었습니다. 그런 어릴 적의 경험들의 노마의 방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식당이라는 곳은 어떤 것보다 지속가능성이 떨어지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완전히 ‘그린’한 레스토랑이란 있을 수가 없고 그러려고 해도 지속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생존을 위한 기본 요소는 많지 않습니다. 노마는 인생을 즐기게끔 해주는 곳입니다. 노마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린하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식재료를 식당에서 100km 이상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급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얼만큼의 탄소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측정해주는 기관도 있습니다. 그 기관에서 노마에서 사용하고 있는 675가지의 원료를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다른 레스토랑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탄소배출량이 적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후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요리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부분도 많으나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입니다.

3333 

 

  • 조안 로카에게>>> 식당 평가의 등급은 어떤 것인가요? 정확히 평가될 수 있을까요?

랭킹이나 평가에 대해서 일방적인 방식으로 고려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레스토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리사는 야심 찬 사람일 수도 있고 불만족이 가득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랭킹이라는 것이 최우선 조건이 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레스토랑은 지금까지 목적을 잘 달성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년대에 해외 여행을 많이 하면서 레스토랑을 돌아보고 “우리도 언젠가 저런 레스토랑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꿈을 가졌고 지금은 그 꿈을 이뤘습니다. 일하는 과정이 즐겁고 사람들이 우리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워합니다. 저에게는 이 자체가 마법과도 같은 생활입니다.

세계는 돕니다(변합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돕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에서 우리의 작은 세계를 건설했습니다. 우리가 가졌던 꿈을 이뤄냈습니다.

 

  • 르네 레드제피에게>>> 식당 평가의 등급은 어떤 것인가요? 정확히 평가될 수 있을까요?

어떤 평가 시스템이든지 완벽히 정확할 순 없습니다. 800명의 사람에게 평가를 부탁해서 종합한 결과 아닙니까? 대체로 얼토당토않은 결과가 나오지만 원래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랭킹이라는 것이 음식문화 자체를 근본부터 바꾼 것은 사실입니다. 노출도와 영향력이 아주 큽니다. 그것이 비록 잘못된 것일지라도 말이죠. 저희의 식당을 바꿨고, 마을을 바꿨고, 도시를 바꿨고, 덴마크도 바꿨습니다.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 평가에서 등급이 높았기 때문에 저 또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든 싫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조안 로카에게>>>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 당신과 같은 마스터셰프, 스타셰프가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식은 코스요리가 아니라는 점 등, 서구 음식문화와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식당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더 발전적인 상황으로 이끌 수 있을까요?

발표에서 우리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창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요. 세계 최고 수준의 셰프들과 일하는 것, 품질을 높이는 것이 아직도 부족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그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시도가 펼쳐져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을 갖춘 셰프를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르네가 말한 것처럼 식당에 대한 평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우리 식당이 하고자 하는 역할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역할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의의를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많이 일하고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 르네 레드제피에게>>>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 당신과 같은 마스터셰프, 스타셰프가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식은 코스요리가 아니라는 점 등, 서구 음식문화와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의 젊은 요리지망생들에게 한마디 이야기해주시죠.

마스터셰프나 스타셰프를 배출할 필요가 있다거나 한식이 서구음식과 다르다는 생각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뭘 하려는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재발견해야 하는데, 이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했던 것처럼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몸에 완전히 베어버려서 변화를 인지할 수도 없을 수준으로 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할 줄은 나도 몰랐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절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도 다시 일어나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질투가 샘솟는 순간, 내가 내 동료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 시점은 바로 성공을 할 수 없게 되는 순간입니다. 노마의 팀원들은 모두 20~30대의 사람들로 한 지역에서 살면서 서로를 응원하며 밀어줬습니다. 우리가 한 그룹으로 노력했고 개개인이 열심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 조안 로카에게>>> 음식에서 국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정체성이 없어지기도 하고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적인 방법으로 해외에 전달하는 것이 옳을지, 접목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

음식문화를 해외에 전파한다는 것은 전통을 유지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유지함으로 그것이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퓨전도 가능하지요. 하지만 새로운 풍미를 들여오더라도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대중적인 음식들이 해외로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지역에 가서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려는 사람은 언제나 많습니다.

222

 

  • 르네 레드제피에게>>> 음식에서 국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정체성이 없어지기도 하고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적인 방법으로 해외에 전달하는 것이 옳을지, 접목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

이 질문은 항상 거대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한식을 더 사랑하게 할지에 대한 비법을 제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든 한식당은 있습니다. 심지어 덴마크에도 많습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 한국 음식은 무엇인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가 궁금합니다.

한 나라의 음식문화를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힘듭니다. 한식 내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이유도 그것이죠. 한국에 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식을 먹기 위해 어떤 종류의 한국 식당에 가야 하는지에 대해 인식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발효음식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음식’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를 발효시킨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발효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어떤 맛이 나는지, 발효음식을 서빙하는 음식점은 어떤 분위기인지, 이런 것들 것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은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본 적은 많지만 명쾌한 정의를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a1

세계적인 요리사 3명은 한국에 무슨 얘기를 남겼나? – 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가 한국에 모이다.

1111

2014년 11월 19일 롯데호텔에서는 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가 글로벌 리더스 포럼에 참여해 한 자리에 모였다. “세계 3대셰프에게 음식의 길을 묻다”세션은 한식재단의 후원과 참여로 진행되었다. 그 내용이 한국의 식문화 발전, 더 나아가 한식의 세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에 기록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한다.

이틀간 진행되는 글로벌 리더스 포럼의 6가지 세션 중 하나로 ‘요리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에 주최측은 “요리는 삶의 방식이고 민족성의 중심이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즐기는 문화적 수단이다”라고 말하며 “높은 경제력을 위해서 관광산업의 호황과 그를 뒷받침할 수준 높은 식문화가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 날 참석한 셰프들은 세계적인 식문화를 선두함으로 국가의 관광산업을 활성화에 식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냈으니, 셰프는 그저 요리를 하는 사람을 넘어 국가 경제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리더임이 자명해졌다.

이 세계적인 세 명의 셰프는 공통적으로 한식과 연관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먼저 분자요리계의 선구자로 불리며 “요리계의 피카소”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피에르 가니에르는 한국에 그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파리, 도코, 홍콩에 이어 네 번째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전통시장을 돌며 식자재를 파악할 정도로 한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프랑스 요리에 한식을 과감히 조화시킨 ‘김치 마멀레이드’, ‘쌀과 샴페인을 가미한 비스크’등을 선보이고 있다.

조안 로카의 레스토랑 ‘엘 세예 데 칸 로카’는 3형제가 운영하는 곳이다. 맏이는 요리를 맏고, 둘째는 와인을,막내는 디저트를 담당한다. 그의 주방은 물리학자나 화학자의 실험실에 가깝다. 전통적인 방식과 현대기술을 접목한 요리로 스페인 요리를 세계 최고 자리로 이끌어 놓았다. 그의 레스토랑에서는 한국의 된장과 간장으로 맛을 낸 양고기 요리와 파스타가 있다. 2009년 우연히 한국 장을 처음 접한 뒤 그 감칠맛에 매료돼 꾸준히 장을 이용한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르네 레드제피의 노마(NOMA)는 북유럽 요리를 뜻한다. 노마는 세계적인 요리 트렌드가 ‘분자요리’의 흐름을 친환경적이교 재료 본연에 집중한 음식으로 돌려 놓은 곳이다. 작은 식당이 중소기업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는데 3개월 단위로 예약을 받는 자정은 개시 직후 마감이 된다. 8년 전에는 16명의 손님이 전무였지만 지금은 하루에 1500명이 찾는다. 이런 노마에서도 발효음식에 관심이 많아 한국에서 된장을 공수해 연구했으며 주방에 ‘발효 숙성실’을 만들어 견과류를 이용한 노마식 장을 제조해 만들고 있다.

세 명의 셰프가 각자 키노트 스피치를 시작했다.

 

4444

  • 피에르 가니에르

한국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문화가 달랐고 식재료가 달랐고 소비자들의 성향이 달랐다. 오늘 이 자리는 내가 요리사로써 걸어온 길을 정리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11

(그는 자신의 요리와 일하는 모습을 사진 슬라이드로 넘겨 보여줬다.)

내 인생을 이렇게 사진으로 담아놓으니 자연 사진도 없고 바깥 활동하는 사진도 없다. 이게 바로 내가 걸어온 길이다. 나는 생업을 위해 요리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가업을 이어 받았다.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처음에 나는 요리가 즐겁지 않았다. 그 상황에 대해 질문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재미없던 10년이 지나갔다.

“정말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 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매년 똑같고 반복적인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것도 굉장히 멋진 수준이긴 했으니까. 그러던 중 한 칼럼을 읽음으로 ‘요리는 사람의 관계를 이어준다’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요리를 계속 해왔지만 정작 요리의 의미에 대해선 몰랐던 것이다.

b3나는 날렵하지도 않았고 기교가 많지도 않았으며 두뇌가 특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 에너지가 넘치기 시작했다. 1981년에 처음으로 나의 레스토랑을 열었다. 그 주변은 상업도시였고 생활형편이 넉넉치 않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명성을 가지기에 적합한 위치는 아니었으나 일을 열심히 할수록 현지인들은 오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

그렇게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엇인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 예술을 하고 싶었다. 메뉴판에 없는 메뉴를 추천하기를 즐겨 했고, 추천한 메뉴를 먹겠다고 하면 주방으로 돌아오는 순간 또 마음이 바뀌어 다른 음식을 만들어 내곤 했다. 나는 요리하는 그 순간에 충실 하려고 한다. 메뉴는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성이며 그 당시의 열정을 요리로 담아내는 것이다.

부도가 나서 재산을 모두 잃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을 크게 하진 않았다. 부도의 원인이 내 요리 때문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파리에서 식당을 열었고 큰 성공을 거뒀다. 식당을 런던에 열자는 무모한 계획도 진행했는데 이 또한 성공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불행인지 행복인지 모르겠다. 나는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장인이 되고 싶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제안과 도움을 받았고 지금까지 총 15개의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다.

해외의 레스토랑을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팀원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외의 레스토랑에 전수할 수 있는 것은 요리 기술이나 재능이 아니다. 정신과 태도를 전수해야 한다.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 고객에게 충실하는 것, 이 정신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222

  • 조안 로카

우리(그는 계속해서 ‘나’가 아닌 ‘우리’로 표현했다.)가 사는 곳은 산악 지역이다. 인구가 9만명인 작은 도시이고 주로 노동자가 살고 있는 곳이다. 아버지는 스페인의 전통 음식인 카탈루니아 지역 음식(이하 카탈란)을 선보이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음식을 파는 일을 3대째 하고 있고 3형제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형제가 함께 일을 시작한 것은 26년째다.

우리가 하는 일은 꿈이라고 생각한다. 요리라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싶었다. 20년 동안 노력한 끝에 7년 전 새 장소로 이전했다.

요리사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항상 창의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상상력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 열정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우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창의성이다.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연구실을 만들었다. 연구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창의그룹으로 계속 새로운 생각과 시도를 하고 있다. 그 결과물들이 메뉴가 되기도 한다.

식당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인턴을 하러 온 사람도 있고 함께 일하려고 온 사람도 있다. 한국인 ‘최’도 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창의성을 불러일으켜주는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20명의 웨이터와 전문 셰프들로 팀이 이뤄져 있으며 15~17개 국적의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스탭’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2년 전부터는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을 휴식하기로 했다. 가끔은 점심시간 서비스를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창의적인 시도를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고, 결과물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서비스하는 시간 외에도 많은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행을 아주 좋아한다.

12한국은 스페인과 공통점이 많다. 기온도 비슷하고 사람들과 성격도 비슷하다. 한국인은 따뜻하고 친절하다. 한국에 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가 붕어빵이었다. 붕어빵을 활용해 에피타이저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의 인상적인 경험을 담은 전채요리다. 손님들은 가보지 못한 한국이지만 우리가 가봤기 때문에 소개해드리고자 이 메뉴를 만들었다. 지구의 모습이 프린트 된 덮개를 씌우고 노래는 “We Are The World”를 틀어준다.

여행을 하는 중, 그 국가에서 느꼈던 풍미를 어떻게 음식으로 담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껏 한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보쌈도 큰 영감을 줬다. 한국의 전통 장이 사용되고 김치도 곁들여지기 때문에 인상적이었고 이를 담아낼 메뉴를 개발했다. 식용유를 사용해 밀가루 반죽을 튀겨내고 그 속에 튀긴 삼겹살, 김치, 장을 넣어서 보쌈처럼 쌓인 듯한 느낌으로 메뉴를 만들었다.

한국의 흑마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도 있다.

이건 한국인 ‘최’가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중탕기계다. 우리는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편이다.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겁을 먹는 게 아니라 호기심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지금 중탕기는 발효용으로 쓰고 있다.

b2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맛을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를 계속 찾아낼 수 있다. 5주동안 레스토랑을 닫고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38명의 스탭이 함께 갔다. 보고타, 멕시코시티 등 여러 도시를 거쳤는데 각 나라의 음식을 살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멕시코에서 자주 사용하는 옥수수라는 재료를 한국의 중탕기를 사용해 발효를 시킨 뒤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냈다. 한국과 멕시코에 가보지 않았다면 이것을 어떻게 만들어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여행은 중요하다.

한국의 쌀 뻥튀기도 인상적이었다. 스페인의 전통음식 카탈란에는 쌀을 이용한 요리가 많은데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곡창지대에서 나는 쌀을 활용해 뻥튀기를 만들었고 요리를 얹어내는 받침으로 사용하기 적합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육지와 바다가 접해 있는 곳이다. 육해공이 한 접시에 담긴 조화로운 음식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돼지고기 위에 정어리 껍질을 덮었다. 생선처럼 보이지만 돼지고기다. 여기에 진한 향이 나는 간장을 소스로 사용했다.

이렇게 한국의 재료들이 스페인의 전통음식과 접목되고 있다. 여전히 이건 카탈란 전통음식이다.

한국의 음식은 굉장히 흥미롭고 가치가 높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정통성을 보다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여러분이 창의적으로 찾아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잠재력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높게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법을 더 다양화하고 현대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다. 그것이 음식을 국제화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잘 팔리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이다.

 

3333

  • 르네 레드제피

한국에서 초청을 4번 넘게 받았는데 이제서야 한국에 왔다. 그 동안 자식을 3명이나 낳느라 바빴다. 양해해달라. (객석 웃음) 청년기에 모두 축구선수나 아이돌 사진을 방에 걸어놓지 않나? 나는 알랭 뒤카스와 같은 요리사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고 자란 사람이다.

난 과거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야기를 하기 위해 12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의 우리는 젊었고 이상주의자들이었다. 한 창고를 개조해 식당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의 경관, 덴마크의 문화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식사라는 경험과 시간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 순간을 맛볼 수 있게 하자. 그래서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배들이 항상 했던 것처럼. 우리 정체성을 찾아서 음식에 담아내는 것을 하고 싶었다.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는 것은 서슴지 않았다. 항상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왜 이렇게만 해왔을까? 왜 여기서 벗어날 순 없을까? 틀을 깰 순 없을까? 다른 음식문화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많은 질문들보다 우선은 맛이 중요하다. 맛이 있다는 조건 하에 이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했다.

과거를 찾아내고 미래를 비추어보자는 것이 우리가 가졌던 사명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접시 위에 시공간과 경관을 담자는 의견에 회의감을 보였다. 아니, 거의 반발 수준이었다. 노마와 발음이 비슷한 ‘고래 음경’ 또는 ‘물개 생식기’로 이름을 바꿔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고래 음경을 먹어보긴 했지만 맛이 썩 나쁘진 않았다. (객석 웃음)

당시 비판하던 사람들의 의견은 이러하다. “왜 캐비어같이 인정받은 고급 음식을 등한시하고 생소한 음식을 찾으려 애쓰냐?” 당시 주변의 쟁쟁한 레스토랑을 보면 정통 프랑스 요리를 선보이고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같은 음식이 있었다. 소소한 변화가 있을 뿐 서너 가지 주요 메뉴를 계속 복제해내는 곳들에 불과했다.

도심지에서 벗어나 요리를 하면 조금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도했지만 멸시는 계속되었고 실제로도 처음의 시도는 그렇게 괜찮지 않았다. 크렘블레에 와인을 넣는다든지, 화이트와인을 넣어야 할 곳에 사과발효주를 넣는다든지, 이런 시도들을 하면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

크렘블레가 지상 최고의 요리라 하더라도 그건 프랑스 요리이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현장성을 크렘블레에 담는 것은 무리였다. 그 실패가 노마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우리는 더 많은 생산자와 만나기 시작했다. 산타클로스와 똑같이 생겨서 클로스라고 불리는 농부아저씨, 깊은 수심에 직접 잠수해 성게를 캐어오는 잠수부를 만났다. 식당의 좌석이 반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런 노력은 계속했다.

기존에 배운 것들을 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 고집을 밀어붙였고 수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강인해졌다.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요리들이 탄생했다. 실험을 계속하면서도 우리는 스스로의 기준을 높여 잡았다. 일정 수준이 나올 때까지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했다.

10시계를 다시 오늘로 돌려보자. 그 당시 하나의 식당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100명의 직원이 있는 5개의 식당이 되었다. 박사학위를 딴 사람, 인류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음식을 배우기 위해 노마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서비스와 음식 준비를 도와주고 있지만 노마에도 실험을 전담하는 주방이 있다. 이 실험실을 우리는 ‘직감의 방’이라고 부른다. 이 방에서는 무조건 신메뉴만 생각하고 갖은 실험을 한다. 직감의 방에 들어가면 보통 99%의 실패를 맛본다.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해야 한다. 이 과정이 있기 때문에 발전을 할 수 있고 창조가 일어날 수 있다. 6년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공간이고, 지금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끝없이 푸쉬하고 있다.

최근에는 어떻게 곤충을 식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여러 문화권에서는 이미 영양이 풍부한 식재료로 이용되고 있다. 개미의 아삭한 식감을 알고 난 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왜? 하필 개미야?”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객석에 계신 분 중 꿀 드시는 분?

자 보다시피 모두 꿀을 먹는다. 사실 꿀은 벌의 토사물이다. 벌이 꽃의 수분을 빨아먹었다가 다시 토해내는 게 꿀이 아닌가. 새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미보다 훨씬 징그럽게 생겼다. 개미를 발견한 순간 “아, 우리는 바보가 아니었을까? 왜 개미를 먹을 생각을 못했지?” 항상 옆에 있던 개미였는데, 지역에 대해 놀라운 발견을 한 순간이었다.

b1노마에서는 발효음식도 연구하고 있다. 한국처럼 덴마크의 겨울은 무척 춥고 혹독하다. 5~6개월 동안 계속되는 겨울 동안 발효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것이다. 발효가 있기에 빵, 와인 등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이니 발효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버려야만 했던 채소의 갖은 부분들은 육수로 끓여낼 수도 있고 식초에 절여 먹을 수도 있다. 발효를 이런 곳에 적용할 수 있다. 얼마 전 30년 된 4개의 컨테이너를 구입해 발효공간으로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음식을 썩히고 있다. 맥젓, 미소된장 등 모든 음식을 썩혀본다.

현재 노마는 점심과 저녁 모두 만석이다. 2주 전 점심 웨이팅 리스트에 4000명이 이름이 올랐지만 40명 밖에 대접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 일을 이룰 수 있었나?”라는 질문을 주최측에서 했다. 창의성을 가지고 일을 하려 했다는 답변은 당연한 소리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는 음식 말이다. 이런 중요한 것을 놓치고 기존의 방식에 따랐다면 노마는 수많은 발견을 놓쳤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도 이 일을 했기에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셰프쟈켓과 앞치마를 매야 한다는 규율도 파괴했다. 편안하게 요리하고 손님은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주방에 일본, 호주, 한국사람이 더 많다. 현재 4명의 한국인이 함께 일하고 있다. 동료 중 데이비드 창 이라는 셰프가 있는데 이 사람의 독창적인 생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레스토랑의 메인 홀을 닫았다. 메인 홀에서 가장 많은 돈이 나왔는데 이걸 닫아버렸다. 셰프들에게 메인 홀은 끔찍한 곳이다. 대규모 연회를 매일같이 연달아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메인 홀의 큰 테이블을 갖다 놓고 스탭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장소를 바꿨다. 노마가 계속 바뀔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질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높아졌다 식음료업계에서 중요한 변화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가 있었기에 하버드를 나와서도 음식을 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도 생긴 것이다. 예전엔 학교를 중퇴했거나 범죄자들이 주방에서 일을 했다. 지금은 인간적인 존중이 있고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바꼈다.

코펜하겐은 음식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다. 음식 역사에서 소외된 곳이 부각되고 있다. 어느 논문에서 말하기를; 지난 5년간 덴마크의 관광산업이 12% 성장했는데 그 이유가 음식 덕분이라 했다. 이건 놀라운 수준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이 많다만 막 걸음마는 뗀 단계이고 곧 청년기를 겪을 것이다. 노마도 훗날 지루한 어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질 않길 바란다.

이어지는 기사 : 패널토의 바로가기

셰프뉴스 운영일지 (1,2,3,4 통합)

  • 첫번째 운영일지 | 8월 21일

셰프뉴스 페이지를 운영한 지 4주가 넘어간다.
운영일지를 쓴다.

  1. 모바일 접속자가 92%에 달한다.
    젊은독자층과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기에 모바일로 접속하시는 분들이 대다수다.
  2. 페이스북이 유일한 콘텐츠 유통 창구
    독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더 효과적인 유통창구는 없을 듯하다. 외식 관련 종사자분들은 IT종사자들에비해 페이스북에 대한 거부감이 더 낮은 것으로 보인다.
  3. 콘텐츠에 따른 반응, 기복이 심하다.
    hook할 만한 콘텐츠 위주로 사이트 트래픽을 높이는 전략은 초기에 필수라 생각했지만, 콘텐츠만으로 웹사이트의 정기방문자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실시간 소통에 더욱 성실해야 함) 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4. 페이지보다 영향력있는 팔로워 분들도 있다.
    몇 개의 콘텐츠는 페이지에서 공유된 것보다 팔로워(스타셰프)가 공유했을 때 더 큰 인기를 끌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덕분에 새로운 좋아요는 급증한다. 대중을 타겟으로 하기보다는 이 분들을 위한 콘텐츠를 준비하는 것이 더 선명한 목표가 된다.
  5. 소비용 콘텐츠보다는 소장용 콘텐츠의 가치가 높다.
    독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콘텐츠가 독자의 허영심 덕분에 공유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외식산업과 관련된 분들 중에는 배움을 원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최신의 실용적인 지식도 다뤄야 한다.
  6. 산업에 네트워킹이 부재한다.
    이 산업에는 온, 오프라인 모두 네트워킹이 부재한다. 이는 3년 전에도 짐작했던 바지만 그 필요성은 3년 전보다 많이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셰프뉴스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점에 감사한다.
  7. 실속없는 콘텐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대중매체는 대중이 좋아할만한 내용만 쏙 뽑아서 스타셰프를 만들어낼 뿐이다. 광고주와 독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매체는 산업의 주인공을 하이라이트해주긴 하지만 지원해주진 못한다. 그래서 영혼과 철학이 없이 과포장된 정보만 돌아다닌다.
  8. 산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 : 토론공간, 네트워킹 (가설과 계획)
    한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 정보가 돌아야 하고 사람이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실제 산업 역군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채널로 산업미디어가 필요하다. 실제 산업 역군들끼리 영향을 주고 받을 중간자 역할도 도맡아야 한다. 온라인 포럼과 오프라인 이벤트 진행, 채용 플랫폼 개발이 필요하다.
  9. 혼자 일하기 싫다.
    어떻게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까지만 일을 펼치거나 내가 이해한 다음에 일을 진행한다는 주의이기 때문에 아무한테도 도움구하지 않고 혼자 일하고 있다. 그래서 고독하다.
    일의 진척속도가 느려지는 것도 문제인데, 어디 사람 없나? 이 글 보고 간이라도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편히 연락주세요.

 

  • 두번째 운영일지 | 9월 14일

주말에 카페와서 일하고 있다. 주말인건 괜찮은데 카페가 질린다. 다음주엔 사무실을 좀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두번째 운영일지를 쓴다.

  1. 8월 마지막주엔 1주일치 콘텐츠를 모두 예약발송해놓고 4박5일 일본여행을 다녀왔다. 신나게 놀고 돌아오니 팬이 세 배로 늘었더라. 영상 하나가 250만명에게 전달됐고 6만명이 좋아요를 눌렀더라. 바이럴되는 가속도가 확산이 느려지는 감속도를 훨씬 앞질러서 연쇄반응이 일어나 새 독자를 이끌고 왔다. 임계점을 넘긴 쾌감이 있었지만 모든 콘텐츠가 이와 같은 무작위 확산을 목표로 해선 안된다.
  2. 추석 기간 동안 페이지 홍보를 써봤다. 1명 데려오는데 80~100원 정도 비용이 지출되었으니 다른 페이지보다 훨씬 효율이 좋은 편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페이지를 눌렀으니 Engagement가 높은 고객층일 것이라 예상했다.
  3. 이번 주부터 갑자기 스페인, 멕시코,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 베트남 출신 신규구독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신규팬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다. 당장 광고를 중단시켰다. 한국인들이 주로 유학가는 국가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좋은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2시간 동안 일일이 수작업으로 600명에 달하는 외국인을 솎아내 모두 쫓아냈다. 페이스북에 광고비가 아까웠다며 항의하려 했으나 페이스북은 항의 창구를 만들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 쓴다. 보고 있나!?
  4. 공유 수는 100개가 넘는데 실제로는 10명도 채 확인이 안되는 경우가 있다. 친구들에게만 공유하거나 혼자보려고 숨겼기 때문이다. 유용한 정보들은 확실히 더 그러하다. 바이럴에는 도움이 안되지만 독자들과 친밀도가 높아졌으니 어쨌든 개이득.
  5. 타 페이지에서 발행하는 콘텐츠 도달율이 보통 전체 팬 수의 10~15%정도 나온다고 하는데 셰프뉴스는 80~200% 이상 나오고 있다.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코드가 있는 주제라서 다행이다.
  6. 지금까지의 성장률이면 2015년 초까지 10만명의 팬이 모인다는 계산이 나온다.
  7. 기존 매체의 소싱, 제작, 유통과정을 온라인 매체에 비교하면 온라인 매체는 콘텐츠 유통비용이 거의 0에 가깝다. 하지만 이걸 이득인줄로 알고 꽁으로 먹으려 해선 안된다. 유통에도 비용을 써야 한다. 콘텐츠 유통량이 곧 매체 영향력의 척도가 된다. 그러니 안본다는 신문도 집어넣어주고 자전거도 주고 하는거다. 온라인도 비용을 아껴선 안된다.
  8. 웹 트래픽은 현재 일평균 800정도, 어떻게든 연말까지 10,000을 찍어야 한다. 일단 트래픽이 있어야 뭐 어디서 본적은 있느냐, 광고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말을 꺼낼건데, 아직 800이다. 광고주가 좋아할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여기에 쓴다. 나라면 지금 이 글 보고 바로 광고문의 한다. 왜냐고? 왜냐면 지금 광고 넣어주시면 제가 3달 동안 트래픽 상승해도 광고비 안 올려받을거니까요! 마수걸이 특가할인 혜택을 놓치지 마세요! 하하! (010-7388-1276)
  9. 생각보다 게시판 설치가 쉽게 되었다. 생각보다 사용성이 좋다. 사용자들에게 쓸모 있는 온라인 공간을 기획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PC형 게시판인데 독자 중 90%가 모바일로 접속을 한다는 것도 난제다. 괜스레 디씨도 일베도 운영자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10. 콘텐츠 소싱과 제작에 대해서 어느정도 체계를 잡아놓았으니, 이를 맡아줄 팀원이 필요하다. 셰프뉴스 기자, 편집장, 상시 채용 중입니다. ~_~

 

  • 세번째 운영일지 | 9월 18일

셰프뉴스 의 세번째 운영일지를 씁니다.

3분전에 페이지 알람을 모두 확인했는데도 30개의 알람이 새로 뜬다. 확인해보면 뒤늦게 셰프뉴스를 발견한 팬이 기존에 올려진 게시물을 모두 좋아요를 누르거나 공유를 한 상황이다. 페이스북이 아카이빙을 하는 데에는 좋은 플랫폼이 아니지만 콘텐츠 발행자의 기준이 엄격하면 책장을 계속해서 넘기는 잡지만큼이나 볼만한 담벼락이 나올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SNS는 책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지 인사이트(관리자 분석 정보 제공 툴)를 보면 ‘총 도달’수치에 현혹되기 마련이다. 총 도달 수치를 올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대박 콘텐츠를 공들여 기획해 발행하거나 다수의 콘텐츠를 마구잡이로 발행하는 것이다. 다수의 콘텐츠를 마구 발행하면 단기적으로 총 도달이 늘어나지만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껴 이내 기본 도달마저 줄어들게 된다. 팔로우 취소와 게시글 숨기기는 곧 채널의 죽음을 뜻한다. 한 번 잃은 팬과 평판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평판상실은 불과 2주도 채 걸리지 않는다.

콘텐츠 유형에 따라 확산이 많이 되기도, 적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도달은 똑같다. (이는 팬/팬이 아닌 사람의 비율로 알 수 있다.) 모든 콘텐츠가 달리기를 시작하는 출발선은 같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특정 콘텐츠 유형에 잘 반응하는 경향도 있지만 엣지랭크(페이스북의 콘텐츠 추천 알고리즘)의 지속적인 정책 변화도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페이스북 엣지링크 정책 변화의 목적은 콘텐츠편식을 중재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광고수익을 늘리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매체라면 그들의 지면을 자신들의 콘텐츠로 채워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지면 흐름도 조정하고 콘텐츠의 강약조절도 해야 한다. 페이스북에서의 지면은 페이지나 담벼락이 아니라 독자들이 보는 뉴스피드다. 다른 매체들의 콘텐츠와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페이스북에서 강약 조절을 하려고 했다간 볼폼없고 쓸모없는 콘텐츠만 발행하는 곳으로 보여지게 된다. 플랫폼에 따라 이상적인 편집의 방법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래서 강강강강강 콘텐츠만 발행하는 인사이트와 허핑턴포스트가 뉴스피드에서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레전다리, 에이스, 킬링 스프리, 펜타킬. (제 뉴스피드에선 이미 탈주시킴. 내 뉴스피드의 편집자는 나다!)
미국에서 타블로이드가 판쳤던 125년 전, SNS상에서 황색언론이 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인쇄할 수 있는 기사는 모두 씁니다.”=>”퍼 나를만한 기사는 모두 씁니다.”

이런 현상이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거나 의식수준이 높아져서 어느 순간에 중단되든, 플랫폼에서 언론중재를 하든, 결국에는 정리되어야 할 상황이고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 혹여나 이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사회현상이라는 소신은 지켜야 한다.

강강강강강을 이용하면서도 올바른 새 언론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곳도 있다.
버즈피드는 미디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술회사로 새로운 디지털 콘텐츠 포맷을 계속 찾아내고 있다.
ㅍㅍㅅㅅ는 편집자의 역량이 뛰어나서 깊이도 있는 콘텐츠가 있다. 슬로우 뉴스의 좋은 정신을 잘 이어간다고 생각한다.
피키캐스트는 모바일에서 최적화된 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 네번째 운영일지 | 11월 14일

운영일지를 쓴다. 한동안 안썼다.

창업일지가 아닌 운영일지로 이름을 붙여 썼던 이유는 3달 전, 페이스북으로 콘텐츠를 유통하는 것이 재미가 있기에 소셜 마케팅 노하우를 공부하고 복습하고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건 그 둘의 중간 쯤 되겠다.

셰프뉴스는 온라인 미디어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이것 저것 모든 일을 하려는 노가다 서포터 집단이라고 보면 된다. 해야 할 수많은 일 중 온라인 미디어는 30%정도의 비중을 넘지 않게 될 것이다. (미래의 일이겠지만)

구색을 갖추기는 쉽다. 워드프레스 7일 배우니 다 되더라. 영양가있는 콘텐츠 채우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70일 정도 관련 콘텐츠 서핑 계속 하니까 어지간히 볼만한 내용 소싱은 할 수 있겠더라. 산업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실행하는 것은 꽤 어렵다. 아마 700일 정도 계속 하면 될 일일까?

온라인 미디어를 활용해 특정 타겟을 사로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그 사람들의 서재를 뒤지고, 그 사람들의 꿈과 미래 계획을 듣는 것이다. ‘가설 설정과 실행’이라는 어려운 방법론도 필요 없다. 그냥 독자를 만나는 방법이 제일 빠르고 정확하다. 물론 해당 타겟의 울타리가 명확할 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세상 사람은 두 분류로 나뉜다. 미디어를 이용하는 사람과 미디어에 의해 이용당하는 사람.
산업미디어는 산업 구성원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다. 생태계를 건강하게 발전, 진흥시키기 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구성원은 자신의 이기심을 드러내줘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동력 또한 기업들의 이기심 아니었던가. 모든 구성원의 이기심이 충족될 때, 그 상태가 건강하다고 정의된다.

산업미디어도 미디어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로써 가져야 할 최소한의 사명감과 책임감은 똑같이 부여 받는다. ‘독자가 원한다’는 변명으로 트래픽 장사를 하다가 욕 먹고 있는 게 우리나라 언론의 현실이 아닌가. 트래픽 장사치들을 이겨낼 욕심도 없고, 그걸 이긴다고 승리하는 게임도 아니다.

산업이 생기면 정보가 돌아야 한다. (미디어의 역할)
산업이 생기면 사람들이 만나야 한다. (이벤트, 모임, 커뮤니티, 박람회, 컨퍼런스, 포럼, MICE, whatever etc.. 의 역할)
산업이 생겨서 미디어와 모임이 생기는 것일까, 미디어와 모임이 있기에 산업이 성장하는 것일까. 닭과 달걀 이야기다.

미디어가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인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박람회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온라인 미디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산업미디어로써 절대불패의 장점은 아니다. 그냥 조금 유리할 뿐이다.(이미 온라인 미디어로 접근했다가 은근슬쩍 운영 접은 곳 여럿 발견) 미디어로서 해야 할 과제는 똑같이 부여되고, 누가 얼마나 핵심을 잘 파악해 실행해내느냐에 달린 문제다.

인생 최고의 맛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기억이다. 이찬오 셰프를 만나다.

아주 오래 전, 원시 인류에게 식사라는 행위는 생명을 연명하기 위한 영양소 섭취에 지나지 않았다. 근대 인류에게는 하루 세 끼의 식사가 정기적으로 이뤄지면서 의식이자 생활로 자리잡았다. 이를 넘어서서 식사는 자기만족을 위한 사치이자 문화적인 활동으로, 예술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요리가 예술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음식은 그저 먹고 맛만 있으면 된다는 주의가 한국에선 더욱 다수의 지지를 얻을 것이다. 다른 예술 작품도 많은데 왜 음식으로까지 예술을 해야 하냐며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의견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고 드는 것은 아니다. 이찬오 셰프의 요리를 보면 그런 생각이 한 풀 꺽일 것을 알기에 그저 그의 화려한 음식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1_Time 4_yard

3_Autumn
5_Shore 2_Morning6_Hope 7_Springrain

이런 작품들이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훑어 내리고 있자면 마치 미술관에 온 느낌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요리-예술작품에 댓글로 자신의 감상평을 올려 공유한다.

수려한 외모에 화려한 경력, 비쥬얼 좋은 그의 요리들, 대중 매체를 통해 그는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포장되어야 할 사람보다는 오히려 포장지를 벗겨버려야 할 사람이다. 그 화려함 뒤에 영글어 있는 고독한 영혼, 무쇠의 뿔처럼 강인했던 사나이의 인내, 세상 풍파를 다 헤치며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간 백전노장(百戰老將) 이찬오 셰프를 소개하고자 한다.

_MG_3056

| 시각적인 충격이 그를 요리로 이끌다.

이찬오 셰프를 요리사나 예술가로 소개하고 싶지만 누구나 그를 처음 만나면 운동선수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떡 벌어진 어깨에 넓은 이마, 큰 입과 호탕한 웃음. 테스토스테론 충만해 보이는 이 남자는 수영을 하던 운동선수였고 18살에 호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진 요리와는 전혀 친분도 없던 사람이었다. 집안에 손을 벌리기가 싫어 생활비를 벌겠다며 접시를 닦기 시작한 게 식당과 맺은 첫 인연이었다. 몇 년을 주방 일손으로 보냈으나 요리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집세를 못 내서 쫓겨났던 적이 있어요. 헤드 셰프의 집에서 일주일 정도 얹혀 살았거든요. 집안에 요리책이 많길래 한 권 꺼내 들었는데, 아! 충격이 어마어마한거에요. 찰리 트로터(Charlie Trotter)의 책이었어요. 그 시각적인 경험은 평생에서 가장 충격적이었어요. 요리가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구나!”

그 때 나이 21살, 책 한 권을 펼침으로 인생의 출발점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다음 날 출근길에 공원에 들려 휴대폰을 멀리 집어 던졌다. 자신의 결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피곤하게 속박하는 사람이었다.

“전 그냥 요리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책 보고 하루 종일 요리하다가 저녁에 다시 책보면서 잠들었으니까요. 인생에 빈틈이 없이 요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어요. 요리, 요리, 요리, 요리, 요리. 일주일에 침대에서 잔 날이 한 번도 없었어요. 만날 소파에서 책 보다 잠드니까.”

그 당시 이찬오 셰프가 받았던 돈은 1주일에 700불, 방세와 식비, 교통비를 빼면 300불이 남았다. 거기서 책을 두 권 사면 100불이 남는다. 그 돈을 두 번 모아,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서 혼자 식사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식당으로 출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요리책을 보다 잠이 든다. 휴대폰도 없이 이 생활을 4년 했다.

“호주에서는 실력이 있으면 인정 받아요. 저는 또 운동을 한 사람이잖아요. 그 때는 체력이 지금보다 더 좋았거든요? 제가 남들보다 단 한 가지도 꿇리지 않는 거에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제가 휘어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어요.”

세 번째 식당이었던 펠로(PELLO)에 들어가면서 수셰프(Sous Chef)가 되었으나 이내 펠로가 새로운 지점을 열게 되면서 새 지점의 헤드셰프(Head Chef)까지 오르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요리를 시작한 지 불과 만 3년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휘하에 13명의 요리사를 거느렸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매일 같이 자신이 만들고 싶은 파격적인 메뉴를 진두지휘했다.

 

| 프랑스 정통 요리를 배우다.

4년의 전력질주 후에도 그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돈을 조금 더 벌긴 했으나 모인 돈은 없었다. 남는 돈이 있으면 더 좋은 파인다이닝 식당을 찾아 밥을 먹는데 쓰는 사람이었다.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뭐, 그냥 그렇네”, “이건 나도 하겠네” 정도로 평가하고 다녔었는데, 시드니에 있는 빌슨스(Bilson’s)라는 레스토랑에 갔다가 완전 깨졌어요. SMH 모자3개(호주의 미슐랭) 받은 곳이었는데, 그 때의 충격이 찰리 트로터 책만큼이나 충격적이었어요.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음식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는 거 있죠.”

한 권의 책이, 한 접시의 요리가 얼마나 큰 충격을 줄 수 있는지 필자와 같은 일반인이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거나 위엄이 넘치는 그 한 접시 요리가 그의 인생에 기로가 되었고, 그 접시 앞에서 ‘프랑스에 가서 정통 파인다이닝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번에도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바로 다음 주부터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카페로 출근한다. 그렇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피곤하게 속박하는 사람이었다.

“호주는 기본 시급이 세잖아요. 한 시간 일하면 17불 벌 수 있거든요? 아침 6시부터 11시까지 브런치 카페에서 계란 굽고 빵 굽다가 조리복 입은 채로 버스타고 제 식당으로 12시까지 출근하는 거죠. 6개월 동안.”

살 책을 안 사고 먹을 음식을 안 먹으며 돈을 모으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프랑스 땅에 도착했으나 호주에서의 경력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24살 어린 나이에 헤드셰프라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청년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고, 어렵게 Comis Chef(영어권에서는 Apprentice에 해당하는 최하위 직급)로 들어가게 된다.

“구시대적인 방식이죠. 자신의 색깔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요. 식당 용어로는 브레이크다운(Break-Down)이라 부르는 건데, 저도 제 후배들이 백지 상태가 아니면 가르쳐주기 싫거든요. 아니, 가르쳐주려고 해도 다른 색을 입혀줄 수가 없어요.”

배움을 위해 갔던 것이니 직급이 낮아진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매번 자신의 생각을 담아 창작 요리를 하던 사람이 그 폭발적인 욕구를 잠재우고 살아야 하는 것이 더 어려운 부분이었다고.

이 식당에서 미치광이(그의 표현을 빌어) 셰프의 히스테리와 신경질적인 성격을 버텨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찬오 셰프를 제외하곤 모든 스태프는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됐다. 자연스럽게 빈 자리가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불려나갔고 주방의 중심 역할에 가까워졌다. 1년이 되는 날 셰프는 이찬오 셰프에게 제안한다. “수셰프로 들어와라.”

“모든 것이 보상 되는 시점이었어요. 그 동안 악으로 독으로 버텼어요. 하루에 최소 16시간씩 일하고 돈도 없어서 거지같이 살았는데, 프랑스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었어요. 프랑스까지 왔는데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잖아요. 그게 드디어 증명된거죠. 해냈다!”

그는 이 1년의 기간이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증오의 시간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시간만큼 요리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시간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정통 프랑스 요리의 원칙을 배울 수 있었던 배움의 시간,
공든탑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기를 수 차례 반복한 수행의 시간,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수 백 번 각오를 다잡으며 자신의 강인함을 증명해 낸 인내의 시간.

 

| 마라톤 코스를 전력질주하기, 완주 후 쉼 없이 다시 달리기.

이찬오 셰프의 과감하고 성급한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듣는 사람의 숨이 다 가빠질 정도다. 마치 42.195Km의 마라톤 코스를 100m 달리기 하듯이 전력질주 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제서야 마라톤 코스의 마지막에 다다랐구나 싶을 때쯤, 새로운 달리기가 또 시작된다.

수셰프로 와달라는 제안을 보기 좋게 거절하고 향한 곳은 네덜란드의 헤이그(Hague). 요리사 친구가 있어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그 도시에 들렸다. 5년의 긴 요리 인생도 되돌아볼 겸, 곧 군대도 가야 하니 휴식을 할 참이었다. 마음속의 로망이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가보고 유럽의 파인다이닝 식당 투어나 해볼 참이었다.

“스타타그(Statig)! 도착해서 시내 구경 하고 있었는데 스타타그라는 레스토랑에 셰프 구한다고 써있는 거에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아무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 장소가 꽂힐 때도 있잖아요. 문 열고 들어갔다가 그 날부터 바로 헤드 셰프로 일하게 됐어요.”

1년 동안 억눌렸던 창작욕구를 마음껏 터뜨렸고, 아시안-프렌치 요리로 매일 같이 파격적인 메뉴를 선보였다. 네덜란드 현지 사람들이 맛보지 못했던 식재료도 등장했다. 불고기 양념, 미역, 미소된장. 이찬오 셰프는 6개월 만에 헤이그에서 선정한 TOP20 레스토랑 반열에 스타타그의 이름을 올려놓는다.

“마누(이찬오 셰프의 영어이름)는 모짜르트 같이 요리하는 사람”

“누구의 요리도 마누의 것이 아니며, 마누의 요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비평가들의 극찬이 끊이지가 않았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리뷰를 받는다는 만족감이 컸다. 지난 5년 동안의 모든 고생이 보상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악바리처럼 살았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답했다.

“나와의 싸움이고, 내가 기대하던 싸움이었어요. 제가 동경하던 사람들을 목표로 세우고 닮거나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거에요. 고든 램지를 닮고 싶은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코 피어 화이트는 33살에 처음으로 미슐랭 스타를 받았다고 하던데 나도 33살에 미슐랭 받아야지. 마코도 했는데 마누가 못할 건 뭐 있냐고.”

참 피곤한 삶의 방식임을 본인도 인정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에 불만족하는 것, 끊임없이 더 높은 목표를 새로 세우는 것,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어떤 힘든 상황도 이겨내고 마라톤 코스를 전력질주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 순수함을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

로네펠트 티하우스의 정원에 들어서면 입구가 어디인지 찾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 편에 보이는 건물의 기괴한 분위기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2층의 식당이 나온다. 1층은 이찬오 셰프가 작업실로 쓰는 곳.

_MG_3059

_MG_3064

이 작업실을 보면 비로소 이찬오 셰프의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토록 험난하고 역경 가득했던 요리 인생을 산 이찬오 셰프가 지금과 같이 정갈하고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된다.

지금의 이찬오 셰프의 삶은 예전처럼 그렇게 요리로 가득 차있지는 않다. “이제는 좀 일주일에 3일만 일하고 싶어요.”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지만 그 속에는 삶의 여백을 음악과 예술로 채우겠다는 뜻이 들어있다. 아버지는 조각가, 어머니는 재단사, 동생은 보석세공사, 그리고 예술을 하는 친구들이 항상 옆에 있었다. 빈틈없이 빡빡했던 요리 인생 아래에도 예술이라는 문화적인 코드가 깊이 깔려있었고 그의 요리에 꾸준히 베어 나오고 있다.

“요리를 통해서 요리의 영감을 받으면 결국 요리로 결론지어져요. 요리, 요리, 요리, 계속 맴돌 뿐이라 생각해요. 제가 지금 추구하는 것은 그냥 요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영감 받으려고 해요. 미술, 음악, 패션, 색채, 일상, 사건 등에서 영감을 받아서 요리를 하게 되면 결과물이 달라요. 그래서 요즘은 무의미한 요리 공부는 안 하려고 해요.”

그럼과 동시에 그가 추구하는 것은 ‘순수’라는 감성이라고 한다. 순수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절제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아 항상 마음을 훈련한다고 한다. 그가 요리를 시작하게 된 것이 화려한 요리의 인상이라는 출발역이었다면 종착역은 조금 다른 듯 하다.

 

| 기억으로의 식사, 그것의 극대화

10383829_332439513579660_8193658162488249903_o“파인 다이닝은 그냥 배 채우려고 밥 먹으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좋은 시간을 보내거나 특별한 날을 축하하기 위해서 간단 말이에요. 그 시간에 걸맞는 음식이 있어야 하거든요.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수프나 파스타를 먹어야 할 게 아니라, 그 특별한 시간을 강렬하게 기억에 남길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한 거에요.”

그는 기억에 강렬하게 오랫동안 남길 수 있는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음식 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황, 분위기, 음악, 개인적으로 가지는 식사의 의미 등등이 모두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림을 감상하면서 상상에 빠지듯이 음식을 보면서도 상상할 수 있잖아요? 맛과 향, 분위기, 특별한 시간이라는 요소들이 더해지면 감정이 극대화되는 거에요.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거죠. 왜 특별한 음식을 먹은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 당시의 상황이랑 주변 사람들과 나눈 대화, 그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이 떠오르는 거.”

음식의 본질은 먹어서 없애는 것이고 기억의 본질은 오랫동안 남는 것이다. 이찬오 셰프의 요리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자 하는 음식이다.

요리사라는 사람들은 본디 창조하는 것을 좋아한다. 짧은 시간에 무엇인가를 탄생시키고 즉각적인 결과를 보는 것, 이 작업을 하루에 수십 번 반복하는 요리사는 예술가와 닮은 점이 많이 있다. 창작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 끝나지 않은 그의 달리기, 또 한번의 마라톤을 준비하며

그는 한국의 다이닝 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비 성향이 달라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파인 다이닝이 무엇인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 그 이유다.

“일식집 최고급 코스 60만원짜리를 먹으면 무엇이 나올 지 상상되죠? 고급 중식도 몇 십 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먹으면 뭐가 나올지 대충 안단 말이에요. 그럼 양식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사람들은 그냥 파스타 나오고 스테이크 나올 걸로 기대해요. 거기에 몇 십 만원 쓰겠단 생각을 못하는 거죠. 그 스탠다드부터 깨져야 돼요.”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이면 좋겠냐는 질문에 일관적인 대답을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술적인 요리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지만, 다시금 자신을 피곤할 정도로 속박하는 그 모습으로 돌아갔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셰프가 될 거에요. 목표는 크게 가져야 해요. 그런데 이런 목표는 속으로만 계속 되 뇌여요. 밖으로 말하면 진짜 지켜야 하니까요.(웃음)”

웃음이 섞인 그의 대답에선 눈치를 보거나 겸손하고자 하는 가식도 없이 당당하게 답변이 나왔다. 경솔하다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그토록 고독하고 다사다난했던 요리-인생마라톤을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에 불만족하면서 높여 세운 목표 덕이었으리라. 이찬오 셰프는 자신을 이끄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증명해내고 있다.

_MG_3037

요리사가 만드는 진짜조리복 븟;BEUT 배세훈 대표를 만나다

길거리에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은 복합 문화의 메카, 새로운 식문화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는 식당들이 가장 먼저 생겨나는 곳, 이태원의 정은빌딩 5층의 한 작은 사무실에는 요리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한국 유일의 조리복 전문 제작사인 븟-BEUT 사무실이다. 븟은 순 우리말로 부엌을 뜻한다. 이곳에 들어와보면 여기가 부엌인지 옷을 파는 곳이 맞긴 한지 분간이 안 된다. 현관부터 빼곡히 수납된 조리복은 업무 공간을 침범해 천장까지 쌓여있고 3명의 직원은 조리복 담장으로 단절된, 구석의 어둡고 작은 공간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업무를 보고 있다.

반면 부엌과 부엌 맞은 편의 손님용 휴식공간은 꽤 쾌적하다. 200여 권에달하는 요리 서적, 음료는 셀프, 요리가 하고 싶을 땐 주방을 사용해도 된다. 요리사들의 열린 사랑방인 이곳에서는 격주로 현업 요리사를 초청해 강연도 진행한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뼛속까지 요리사, 하지만 지금은 요리가 아닌 조리복을 만들고 있는 븟 배세훈 대표. 그의 좌충우돌 창업기를 들어보았다.

| 고집불통 요리사 바라기와 부모님의 반대

15살, 요리에 빠져든 아들을 둔 부모님은 그저 재미 삼아 그러려니 했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었고 어릴 때부터 항상 아버지를 따라 경찰관이 되겠다고 말하던 아들이 돌연 요리사가 되겠다며 진지하게 고백을 하니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요리학원을 다녔어요. 1년이 지나니까 안양에 처음으로 요리고등학교가 생기더라고요. 그 때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1년을 꿇고 다시 조리고등학교에 입학하겠다, 부모님께 말씀 드렸죠. 그 때 진짜 어버지한테 맞아 죽을 뻔 했어요. 저희 아버진 합이 11단이시거든요”

요리학원에서 요리를 배우고 대학교를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부모님과 타협하며 요리 공부를 계속했다. 요리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지만 부모님의 간섭이 따라 커졌다. 부모님은 25살까지 요리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면 요리를 그만 두라며 다른 일을 찾기를 강요했고 결국 끈질기게 아들의 약속을 받아낸다. 어려서부터 지병이 있던 건강히 넘기는 해가 없었던 아들이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직업인 요리사를 택한다는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25살이 되었지만 사회초년생이 무엇을 이루어 놓았을 리 만무하다. 인간의 삶에서 25살이라 함은 본래 본격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시작하는 시점이 아니던가.

“제가 할 줄 아는 것도 요리 밖에 없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요리였어요. 다른 걸 하겠다는 생각도 못 하겠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언젠가 요리로 인정받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제가 요리하는 것을 단 한 번도 응원해주신 적이 없었으니까요.”

항상 자신이 요리를 하겠다는 것에 반기를 드는 부모님 앞에서면 의기소침해졌다. 25살 청년 배세훈은 어머님과의 약속은 뒤로한 채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다.

| 호기심 많은 청년의 요리인생, 외국 문물과 장비병

그로부터 6년 동안 외국과 한국을 오가며 수많은 주방에서 일했다.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요리사를 만나봐도 공통적이었던 점은 하나같이 장비병에 걸려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도 장비 욕심이라면 뒤지지 않았다.

“좋은 칼이랑 좋은 장비를 갖고 싶은 건 모든 요리사들의 공통된 욕구죠. 그 때 하도 사모아서 지금도 집에 잔뜩 쌓여있어요. 제 주변엔 특히 매니아적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새 장비를 사오면 우와! 좋구나! 나도 가지고 싶다! 라면서 요리사들이 구경하러 모여들고 감탄하고 그러죠”

2012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오키친의 주방에 합류했다. 새로운 업장의 개업을 준비하던 팀이었는데 좋은 조리복을 한 번 맞춰 입어보자며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조리복인 셰프웨어(Chefware)를 맞춰 입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에는 감히 살 수 없었던 10만원이 넘는 조리복이었다.

“전에 입던 것보다는 나았지만 제 값어치는 전혀 못하는 옷이었어요. 게다가 외국인 체형에 맞춰져 있어서 사이즈도 다르고 태도 안나요. 제 키가 178인데 SS를 입어야 한다니까요. 멋은 둘째치고 기능적으로도 만족 못했어요.”

좋은 조리복에 대한 욕심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허탈함에 한동안 친구들끼리 만날 때마다 옷에 대한 불평을 이어갔다. 주변 요리사들도 불편함에 크게 공감했고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만들어보자” 라는 말을 쉽게 뱉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던 문제를 풀고 싶었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이었기에 발벗고 나서고 싶었다고 한다.

| 요리하는 사람에서 옷만드는 사람으로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그는 이내 옷 만드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첫 샘플을 만드는 데 샘플비로만 800만원을 썼어요. 지금이야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때 2~3벌 테스트하면 원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지만 처음 옷 나올 때까지 샘플을 50벌 만들었어요.”

뱉은 말을 주워 담지 못하고 개인 빚까지 내며 사업을 진행했지만 고민과 걱정은 날로 늘었다.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아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몸이 약한 그가 요리와 옷 만드는 일을 병행하다 보니 과로로 몸에 병이 다시 생겼다. 미국 생활도 이태리 생활도 1년을 채 넘기지 못한 것도 같은 지병 때문이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주방에서는 일을 못하고 잠시 쉬고 있던 때였어요. 건강 회복하려고 자전거를 가끔 탔는데 어느 날 크게 넘어지면서 어깨가 땅에 닿았어요. 쇄골 골절이었는데 병원에 2주 동안 입원했죠. 그런데 그거보다 더 심각한 게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교통사고가 났어요. 뒤차가 들이받아서 골절 치료용으로 대어놓았던 철판이 완전히 휘어버렸어요.”

너무 오랫동안 병가를 내어버린데다 무게가 있는 걸 들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다시 주방으로 돌아갈 순 없게 되었다. 이 상황을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 사면초가라고 해야 할까.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 디자인을 부탁하고 의류 수출을 하던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나마 회사 경험이 있던 부인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설립하고 올 해 2월 사무실까지 차렸다. 미국에서 MBA를 졸업한 친누나,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요리 공부를 시작했던 친구까지 합류했고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었다.

“첫 매출 냈을 때, 이상한 감정이 들었어요. 옷이 나왔다고 신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어떤 셰프님이 덥썩 사겠다며 8만원을 쥐어주고 옷을 가져가는 거에요.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기쁘기는 한데 이 돈을 받아야 하는 게 맞나? 요리사는 하루에 수백 개의 접시를 내면서도 음식값을 직접 받진 않잖아요. 그 날 저녁에 혼자 소주 마시면서 울었어요. 고생한 것도 기억 나고 이제는 내가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옷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건강이 약하고 사고까지 났던 것은 확실히 불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새옹지마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븟은 지금까지 23종의 상의 조리복, 9종의 하의 조리복, 11종의 앞치마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

| 국가대표 조리복 브랜드 븟-BEUT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생산된 조리복은 모두 가운사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성가대의복, 졸업가운, 의사가운 등을 대량으로 만드는 복합 제조사인 가운사에서는 조리사의 하루 일과나 몸의 움직임 등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븟에서 만든 모든 조리복은 등판이 모두 쿨론 메쉬 소재로 되어 있다. 스포츠웨어에 주로 쓰이는, 바람이 잘 통하고 빨리 건조되는 기능성 소재이다. 땀을 많이 흘리고 더운 주방에서 일하는 조리복이라면 당연히 이 소재가 쓰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뒤 기장도 길게 내려와있어서 쪼그려 앉아 물건을 꺼낼 때 뒤 허리살이 드러나지 않는다.  노트를 자주 해야 하는 조리사들이 휴대하기 편하도록 펜을 꽂는 위치도 섬세하게 조정했고 소매를 걷었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안감 마감 박음질처리가 되어있다. 목에 건 앞치마 목 끈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무 패킹도 부착되어 있다. 실제로 주방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각해내지 못할 부분이다.

그가 가장 욕심을 낸 부분은 카라 부분이다. 모든 나라마다 그 나라의 조리복 브랜드가 하나씩 있기 때문에, 븟 조리복에는 한국적인 느낌을 담아내고 싶었다는 고집을 다시 보여주었다. 지금 가장 대표적인 조리복 모델에는 목 카라는 보기 좋게 오른쪽 어깨까지 뻗어나가 있지만 이 라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시도했던 샘플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실제 제작을 담당하는 공장에서는 븟 배세훈 대표의 깐깐함과 억척스러움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주문은 복잡하고 종류는 많은데 수량은 적다. 가장 많이 주문했을 때가 100장 밖에 되지 않으니 좋아할 리 없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대량생산되는 옷에 비하면 옷값이 비싼 편이다. 주문량이 많지 않아 제작단가가 워낙 높기 때문인데, 사정은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흑자는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한다.

“저는 요리사였던 사람입니다.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이라 믿고 있고요. 그 마음을 저버리면 사업은 조금 더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요리사로서의 자존심을 버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고지식한 면이 적잖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고집이 지금까지의 쉽지 않은 창업과정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고 또 장인정신이 깃든 옷을 만들어 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그의 입에서 하루 동안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범주는 ‘요리, 요리사, 조리복’ 이 세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도 그는 사업가라기 보다는 요리사로 보인다. 요리를 직업 할 수는 없으니 요리사를 위한 일을 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낀다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좋은 제품을 개발해주길 기대한다.

 

븟 페이스북 커뮤니티 바로가기

븟 온라인 쇼핑몰 바로가기

내 생에 가장 인상깊었던 한 끼

저는 2009년 8월 ~ 2010년 3월, 약 8개월 동안 호주의 식당에서 일했습니다.

첫 번째 식당은 브리즈번의 시내에 있는 이태리/그리스 식당이었고, 두 번째 식당은 멜번의 하드웨어 레인에 있던 POP Restaurant이었습니다. 그 곳엔 20개 정도의 노천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었는데 제가 일했던 곳은 프렌치풍의 파인다이닝을 하고자 했던 헤드셰프와 수익을 위해 저가형 비스트로를 하자는 보스가 매일 같이 메뉴 변경을 놓고 기싸움을 벌이던 곳이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날, 주방에 피자오븐이 들어왔습니다. 프렌치 요리를 하고자 했던 셰프는 그 사건으로 식당을 옮기겠다 선언했고 저를 포함한 모든 팀원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귀국행 비행기표를 끊고 다른 셰프님들보다 일주일 앞서 근무를 정리했습니다.

10665728_10203653365986968_3373239248840895519_n

귀국 3일 전 저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일하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한 번은 내 손님이 되어주지 않겠냐는 수셰프 브라이언의 초대에 홀로 노천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음식이 식기 전에 빨리 가져가라고 욕을 했던 매니저가 무릎에 냅킨을 깔아주고 포크와 나이프를 세팅하며 저를 반겼습니다. 주방에서 봤을 땐 겉멋만 든 답답한 녀석이었는데 그 날 따라 꽤 젠틀한 녀석이었습니다. 이미 메뉴는 준비되어 있으니 고를 필요가 없다며 화이트 와인을 먼저 따라주었습니다. 달콤시큼한 샤도니였습니다. 브레이크 타임에 매니저를 꼬셔 와인을 빼먹은 적도 몇 번 있었기 때문에 그 때 배운대로 입안을 화이트와인으로 고루 헹궜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앙트레가 나왔습니다. 당근퓨레를 곁들인 송어구이, 브로콜리니와 관자구이, 허브 라임 드레싱을 곁들인 굴이 한 접시에 보기 좋게 담겨 나왔습니다. 그 앙트레는 분명 메뉴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10624591_10203653365946967_3419411046439167596_n

쌀쌀한 날씨에 혼자 노천 레스토랑에 앉아 있으려니 머쓱해졌습니다. 길거리에서 항상 공연을 하던 밴드의 노래를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노래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수다 소리가 섞여 들려왔습니다. 왠지 다른 손님들보다 대접받았다는 생각에 우쭐해졌습니다. 앙트레를 마치고 남은 화이트와인으로 입을 헹구니 벌써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저 멀리 주방에서는 대머리 브라이언 셰프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문을 읽고 불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필렛 스테이크가 나왔습니다. 바삭한 감자 로스티 위에 미디움레어 아이필렛이 차분히 올려져 있고 사골육수로 우려내 버섯의 풍미를 더한 소스가 그 위에 끼얹혀 있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제일 비싼 메뉴였습니다. 매니저가 잔을 바꿔 피놋누와 레드와인이 잘 어울릴 거라며 한 잔 따라주었습니다.

10665345_10203653366066970_6588878453872234326_n

음식과 맛에 대해선 더 묘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테이블에서 제가 느꼈던 생각과 감정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득 스테이크를 썰어 먹으면서 영문법도 틀린 이력서를 들고 여길 무턱대고 찾아왔던 그 날이 기억났습니다. 첫 2주 동안 접시만 닦다가 타파스와 디저트를 맡아 달라고 했을 때가 기억났습니다. 근무 시간이 아닌데도 일찍 나와 남의 일을 훔쳐 했지요. 저를 휘어잡으려고 대머리 브라이언 셰프가 온갖 트집을 잡으며 욕을 했던 것도 기억났습니다. 몇 일 전 굿바이 파티에서는 서로 껴안으며 작별인사를 했었지요. 음식을 먹을 줄도 모르면서 분위기 때문에 프렌치 레스토랑에 온 손님들은 미개하다며 욕을 하던 헤드 셰프도 생각났습니다. 저는 지금 먹는 이 음식을 누가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10612955_10203653366106971_1927596177005211552_n

10671503_10203653366146972_3891152336644106612_n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매니저녀석이 12불을 내 놓으라 합니다. 100불이 넘는 음식을 먹었는데 뭔 소리냐 했더니 “You deserve it” 한마디만 하며 손을 내밀 뿐이었습니다.

분명 그 날 제가 먹었던 음식들은 식당에 쪼그려 앉아 한입씩은 먹어본 것들이었습니다. 근데 왜 맛이 달랐을까요. 맛이란 것은 혀로 느끼는 물리적, 화학적 감각이 아니라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깨닫게 된 날이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저는 파인다이닝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 날 브라이언의 손님이 되어보지 못했다면 저는 셰프뉴스를 창업해야겠단 생각조차 못했을 겁니다. 다시 그 경험을 하고 싶습니다. 그 경험을 다시 하기 위해서 고급 식당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먹는 음식을 누가 만들고, 얼마나 공들여 만드는 지를 알면 됩니다.

요리하는 당신을 아는 것, 그것으로 대한민국 식문화 발전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10690145_10203653366026969_4460305411847743426_n